새해를 맞아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친구들과 모토기 중화가에 가기로 한 자리였습니다.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니 벌써 5시간 반이 흘렀습니다. 베이징 덕을 먹고, 복잡한 거리 구경을 하며, 원래의 목적이었던 점술가에게 다녀왔습니다. 글로 표현하면 단순한 휴일 외출에 불과하지만, 그 짙은 느낌은 마치 긴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듯한 편안한 피로감을 안겨줍니다. 우선, 중화가에서 점술가로 가는, 어느 정도 전통적인 미션을 완수했다는 것을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모험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우리는 종종 스테레오타입적인 이미지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웅장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거나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을 모험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독일, 벨기에, 프랑스 등 다양한 문화권에 몸을 두더라도, 그곳에서 삶의 방식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 문화가 가진 본질적인 깊이, 즉 “깊은 레이어”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고 경치를 바꾼 것만으로는 그것은 표면적인 관광에 그치며, 진정한 이문화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산에 가지 않더라도, 익숙한 도시의 미개척된 측면을 깊이 탐구하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더 모험적인 행위로 느껴진다.
작년, 세 박 사 일 동안 오사카 월드엑스포와 세토 내해 예술제를 둘러봤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유명한 부스(파빌리온) 투어, 섬들을 배를 타고 건너가 작품을 감상하며 돌아다녔던 그 여행은 분명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은, TikTok이나 SNS에서 미리 얻어낸 정보를 현지에서 확인하는 것 이상의 ‘정답 맞추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아직 남아있다. 유명한 건축,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전시, 그것들을 스탬프 랠리처럼 낭비하는 것 같은 여행이었다. 그것은 월드엑스포에서 아무 정보도 갖지 않은 채 우연히 들어간 터키메니스탄관에서 갑자기 독재자의 거대한 초상화와 마주했을 때처럼, 뼈 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충격과 전혀 예상치 못한 발견과는 정반대의 경험이었다.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생’의 경험 자체가 여행의 본질일 것이다.
오늘의 점으로 얻은 시사점은 현재 저에게 매우 와닿는 내용이었습니다. 수미술이라는 체계에 따르면, 인생은 9년의 사이클로 순환한다고 합니다. 작년이 사이클의 끝인 “9”였고, 올해가 시작인 “1”이라는 진단은 회사에 다니면서 대학원생이 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는 현재 상황과 너무나 부합했습니다. 이 한 해는 “씨앗을 뿌리는” 시기이며, 조급해하지 않고 결과를 쫓기보다는, 땅을 갈고, 꼼꼼히 시간을 가지고 키워나가야 할 때라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무 급하다”는 지적이 뼈아프게 진실이었다. 좋은 재료와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너무 서두르면서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수확해 버리는 어리석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급함”은 현대 사회, 특히 도쿄와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겪기 쉬운 문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운전 중 빨간 신호나 정체에 짜증을 내는 느낌과 대조적으로, 과거 호주를 여행할 때 의도적으로 왼쪽 차선을 천천히 운전하고 뒤 차량에게 길을 양보함으로써 얻었던 마음의 평화, 그 “안식처”와 같은 느낌을 떠올린다. 속도를 줄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만의 페이스를 되찾고 주변의 풍경을 즐기기 위한 능동적인 선택이다.
마음속에 ‘아라이’라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리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자신을 지니고, 이 시점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무엇인가를 결정하거나, 불안감을 느끼거나 할 때, ‘아라산(예술가)’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나(프로듀서)’는 그것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라는 메타적인 시각을 갖는다면 감정적인 불안에서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자신, 형태를 갖추지 않은 자신을 용납하고 숙성시키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용기’일 것이다.
결과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인생을 단순한 소비 활동으로만 만들어 버린다. 온라인 쇼핑에서 원하는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도착 직후에 즐거움이 최고조에 달하고, 그 후에는 급격히 식어버리는 느낌. 그 속에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풍요로움이 결여되어 있다.
한편으로, 벼룩시장에서의 경험은 대조적이다. 엉망진창인 물건들 속에서, 가게 주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 물건이 겪어온 역사를 상상하며 하나의 접시를 고른다. 그리고 그것을 집에 가져와 요리를 담아내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며 마모시킨다. 그곳에서는 “구매”가 목표가 아니라, 물건과 자신과의 관계의 시작일 뿐이다. 여행지에서 산 아웃도어 의류나 친구와 함께 고른 헤드폰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여행의 기억이나 친구와의 대화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매개체”가 된다. 사용될 때마다 그 당시의 풍경이 떠오르고, 물건은 삶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렇게 문맥과 이야기를 엮어내며 시간을 가지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진정한 풍요로움이 아닐까.
일상생활에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쉽게 직업이나 라벨로 대답하려 치닫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츠야마 시로시가 직업을 묻는 질문에 “츠야마 시로시입니다”라고만 답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혹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라고만 답하는 친구의 모습처럼, 지나치게 설명을 생략하고 단순히 “나”로서 존재함에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받는 평가나 기존의 카테고리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넣을 필요는 없으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이해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때 충분한 것이다.
메이지 신궁에서 참배하는 줄에서 만났던 독특한 메이크업과 패션의 커플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주변에서 튀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완결되어 있었고 당당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같은 공간에 머무르면서 서로에게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반대로 배척하지도 않으며, 각자의 분위기를 존중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예절”을 갖는 것이 아닐까. 일본 사회에는 종종 “동조 압력”이라는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지만, 본래 갖춰야 할 공공의 장소에서의 행동 방식은 서로 “타인”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조용히 공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첫 복례 줄에서 큰 소리로 도박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처럼, 그 자리에 흐르는 맥락을 읽고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지행이다.
결국, 인생에서 많은 일은 흑백으로 나누거나, 쉽게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예술이 보여주는 순환처럼, 지금은 씨앗을 뿌리고 그 싹이 트도록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조급함에 휩싸여 억지로 모양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나, 아무도 아닌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모험과 대화 과정을 통해 확인한 것은 자신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리듬에 맞춰 나아가는 것의 중요성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관용심과 양보하는 여유를 갖게 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히야마 전체’ 자리가 신체적인 시술을 행하지 않고 대화만으로 감각을 되찾는 장소였던 것처럼, 인생 또한 명확한 형태가 없는 대화와 경험의 축적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신의 페이스대로, 자신의 발로, 미지의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그렇게 매일의 경험을 쌓아가는 끝자리에 아직 만나지 못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출처: note 원문
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8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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