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정이 샘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체온이 살짝 올라간 듯한, 마치 목욕을 마친 뒤처럼 훈훈해지는 감상 후의 느낌이 정말 좋다.
영화 ‘사토코는 언제나’를 봤다. 사전 정보는 전혀 없었고, 몇 달 전 영화관 포스터에서 한 번 보고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줄곧 나 자신에게 필요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마침 9월 중에 기한이 만료되는 1000엔 관람 쿠폰을 꼭 써야 한다는 초중요 미션도 있었기에, 며칠 동안 극장 상영 스케줄을 들여다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도보 20분 거리의 익숙한 영화관에서는 레이트쇼로 상영해서, 다 보고 나면 날짜가 바뀔 예정이었다. 그것 나름대로 작은 상영관 안의 몇 안 되는 관객끼리만 비밀을 공유한 듯한 여운을 안고 귀가하는 것도 즐겁지만, 문제는 다음 날 수면 부족이 확정된다는 점이었다. 그건 좀 그렇다고 생각했고, 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입장으로서 고민되기도 해서, 문득 전철로 30분 정도 걸리는 같은 계열 영화관의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여기는 아침 8시부터 상영이라, 즉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이 확정이었다. 좀 귀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고 싶다. 가능한 한 자고 싶으니 좀 귀찮긴 한데, 낮 상영이나 레이트쇼로 본 적은 있어도 ‘일찍 일어나서 영화를 본다’는 경험은 지금까지 없었기에 순수하게 호기심이 일었다. 수면 부족과 이른 기상 중이라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 같지만, 뭐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보다 호기심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일들을 선택해 온 것 같다.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덧붙이자면, 수면 부족은 좋아하지 않지만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은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비인후과에서 자주 보는 네뷸라이저를 코에 꽂고, 멍하니 벌린 입에서 모락모락 하얀 약제 연기를 내뿜는 열다섯 살 사토코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리
글을 쓰는 것은 즐겁고, 그리고 조금 괴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집필을 생업으로 삼고 있지 않으며,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을 꽤 좋아했고, 지난 10년 정도 소중히 여겨 온 한 사람에게는 편지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쪽의 메시지며 이런저런 것으로, 아마 적게 잡아 세어도 수백만 자에 이를 말들을 계속 건네고 있다. 5일 동안 편지 10통을 건넨 적도 있었고, 봉투 한 통에 편지지 20장을 욱여넣은 적도 있다. 6년간 손글씨 팩스를 계속 보냈더니 결국 695장이 되었다. (친구들에게는 “상대가 그 사람이니까 우연히 괜찮은 것뿐이고, 보통 다른 사람이었으면 무서워했을 거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우연히 좋아하게 된 상대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해. 언제나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전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내 사전에 있는 서툰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서, 언어화 자체를 포기한 적이 몇 번이나 있다. 편지도, 팩스도, 몇 시간씩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매고 글을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너덜너덜해지는 바람에, 버린 편지지와 복사 용지는 도대체 전부 합치면 몇 장이나 될까.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작품 속 사토코들도 몇 번이나 말을 찾다가 문장을 연필로 지우거나, 또 “꺄아” 하고 괴성을 지르며 방 안을 날뛰며 몸부림치거나, (그런 사토코를 걱정해 방에 우르르 모여드는 부모님의 사랑스러움, 거부하는 중학생 사토코의 나이다운 거리감이 좋다. 건강한 부모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징그럽네”라며 자신이 쓴 문장을 코웃음 치는 모습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표현을 찾는 시간은 끝없이 방황하는 듯한 감각에 막막해지고, 진심을 쓴다는 것에는 왠지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부끄러움이 있다. 왜 그렇게나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이토록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까.
“쓰다”라는 행위가 없더라도 우리는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메시지 주고받기나 일과 생활에 필요한 서류나 설문지 작성 같은 최소한의 필요는 요구되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품은 감정, 마음속에 간직한 이야기를 글로 공들여 형상화할 필요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만 있으면 글을 쓰는 것을 신기해한다. 부정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지만, 그 사람들의 인생에는 없는 행위이기에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왜 이렇게까지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잘 쓰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일도 많으면서, 그럼에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감상 중에도 “이 영화는 쓰기를 만나고, 쓰기로 정리하고, 쓰기와 이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했기에, 보통은 그렇지, 계속 쓸 필요는 없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어깨를 두드리는 듯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기뻤다. 노트를 버리고, 데이터를 지우고, 정성을 들여 쓴 작품의 행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토코’가 마지막에, 그럼에도 쓰고 싶다는 욕구에 솔직해져 다시 펜을 움직이는 결말이. 15살의 사토코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정신없이 노트에 샤프펜슬로 써 내려가는 모습도, 35살의 사토코가 흉기에 찔리게 된 원인이 된 불륜 상대를 불러내 인터뷰까지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모습도, 55살의 사토코가 바글바글 끓어 달그락거리는 냄비 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모습도. 분명 이유 따위를 넘어선 감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리라. 그저 쓰는 것에 매료되어 오롯이 언어를 엮어 나가는 그녀들의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고, 놀랍도록 아름다웠으며, 스크린과 마주한 나마저도 긍정받는 기분이었다. 쓰는 데에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다. 이유를 갖다 붙이고 싶어질 때 나는 그에 어울리는 이유를 멋대로 덧붙이면 된다, 나는 그저 쓰고 싶을 뿐이다. 분명 그것만으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엔드롤에서 익숙한 오리사카 유타 씨의 노랫소리가 들려와 기쁨에 젖어 있던 찰나, 새까만 화면에 흘러나온 “음악: 시바타 사토코”라는 하얀 글자에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실은 네 번째 사토코가 음악이라는 형태로 작품 안에 있었고, 이야기 속의 “사토코들”과 현실에서 말을 엮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토코 씨”는 확실히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이토록 기분 좋고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하고 조용한 극장 안에서 너무나 기뻐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만약 영화관이 어둡지도 않고 단차도 없는 장소였다면, 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것이다. 딱히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이 마주치는 누군가와 눈빛으로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아니, 대체 이런 최고의 일이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사랑과 의미와 말, 그리고 마음의 온기를 담은 훌륭한 작품을 보고 만 것일까.
귀갓길에 집어 든 것은 초등학생 시절 정말 좋아했던 하야미네 가오루 선생님의 『귀찮쟁이 너를 위한 글쓰기 교실』이라는 책이었다. 이번 달에 책을 몇 권 샀는지 벌써 잊어버렸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도 다 파악하지 못할 정도이고, 이제는 조금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일단 머릿속에는 있다. 집 베개맡에 50권 넘게 쌓여 있는 책들의 모습도 스치듯 떠오른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가 언제나 책더미에 부딪혀 눈을 뜨곤 한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고, 저항하지 않았다. 나는 쓰고 싶다. 마지막에 나란히 선 사토코들이 노트에 적어 둔 바람에, 나도 굽은 등의 나 그대로 경의를 담아 솔직하게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흐린 날씨와는 정반대로 왠지 상쾌했다. '사토코는 언제나', 정말 좋다고 콧노래 부르듯 말하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나는 분명 앞으로도 넘어질 때마다 오늘 감상한 뒤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던 감각을 더듬어 떠올리며 또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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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8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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