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도 막바지에 다가오고, 매일 이어지는 비까지 더해져 에어컨 없이도 매우 쾌적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영화 ‘우리는 외계인’을 관람했습니다. 감상 전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로는 “우정을 바탕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보낸 어린 시절을 향수를 자아내며 회상하는” 듯한 영화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배경으로 내일의 걱정 없이 밭에서 끊임없이 뛰어노는 ‘천체 관측’ 영화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작품을 관람한 후에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습니다.
이번에 주목할 만한 작품 『우리는 외계인』에 대한 감상을 덤덤하게 적어보고 싶습니다. 생각들이 다소 어설프거나, 제 개인적인 경험을 곁들여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지난번에 읽은 ‘너, 여왕공주’가 정말 훌륭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상미와 시나리오 작가 미야가와 도시요시 씨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감상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특히 주인공 비비안 랑군이 겪는 갈등이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동시에 강하게 감정을 이입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다. 그녀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사랑과 우정 속에서 성장해나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듯했다.
또한 이 작품에는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담겨 있어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고 자신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
본편에 대한 감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봐서 힘들었어.
이 한 문장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솔직히 엔터테인먼트로서 완전히 소화하기에는 제 개인적인 경험과 너무나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매우 답답한 이야기였습니다. 초반의 극도로 고해상도의 어린 학생 묘사가, 어딘가 잊혀진 듯한 아주 먼 과거의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당시 겪었던 잔혹한 날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코라쇼 기상 알람 시계, 라면 가방에 넣고 다니던 디오시스 포켓몬 스티커, 일단 미래의 꿈은 “축구 선수”라고 대답하는 등, 당시를 되돌아보면 “정말 그런 일을 했었지”라는 묘한 향수 덩어리가 느껴졌습니다. 어린 학생으로서의 사소한 일들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묘사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부모님께 숨어서 게임을 하고 발각될까 봐 걱정하고, 부모님께 빌린 우산을 깨뜨리고(깨져서), 그것을 솔직하게 사과하지 않고, 상황을 핑계질하며, 결국 뒤늦게 엄격하게 혼났던 기억이, 이 작품에서는 훌륭한 호러적인 연출로 완벽하게 재현되어, 제 심장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의 향수 어린 영상 속에서 특히 기억을 흔들었던 것은, 당시 나의 의형제 같은 존재로 자주 함께 놀았던 친구의 존재였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아카타로”라는 아이가 등장했지만, 저에게도 그 “아카타로”와 비슷한 친구가 한때 있었습니다. 함께 그네를 타고 신발을 잃어버리거나, 집에서 몬헌을 하거나, 적은 용돈을 쥐고 자전거를 질주하며 만화를 사서 함께 읽는 등, 둘이만 있는 세상에서 보냈던 기억이... 하루하루가, 제 안에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따돌림”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다가왔다. 집단에서 벗어난 학생은 결국 ‘나쁜 아이’라는 낙인을 찍게 되고, 뒤에서 험담하는 분위기가 교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가 예전에 같이 놀던 친구들은 그 대상으로 변했고, 결국 멀어졌어.
원죄의 이야기
1차 번역문에서 미번역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어휘를 교정한 최종 한국어 문장:
‘원죄’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복잡하고,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이야기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종교적인 관점에서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물로 인해 인간이 죄를 짓게 된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왜 인간은 죄를 짓는가? 왜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에 사로잡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니체의 실존주의, 그리고 셸리의 프롤로그가 큰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며, 우리의 행동은 의식적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원초적 쾌’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욕망은 단순히 죄악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이자 창조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셸리의 ‘프롤로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자유의지는 곧 고통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사상가들의 시각을 통해, 나는 ‘원죄’라는 개념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원죄’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의 원천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원죄’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많은 고민과 노력을 통해, ‘원죄’라는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외계인에서는 그렇게 찢겨 나간 두 사람의 이후 삶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향수에 잠기는 영화가 아니었던 거죠. 어린 시절부터 소외당한 경험을 가진 아카타로오는 이후 삶에 잘 풀려 있지 않았고, 반면 주인공 츠바사는 부모에게 강요된 혹독한 공부의 반작용으로 일시적으로 문제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대학교에 진학하여 굽이치는 길이지만 순조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학문과 예절을 모두 갖춘 훌륭한 학생으로 모두에게 존경받던 아카타로오와, 내성적이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츠바사가, 점차 학년이 진행될수록 입지가 역전되면서, 그곳에서 형성된 학교 카스트는 그 이후 삶까지도 크게 좌우하는, 지나치게 끔찍한 구조라는 것을 결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강하게 느낀 점은, 이것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어린 시절에 지고한 ‘죄’”를 다시 인식하게 하기 위한 영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순풍만간한 인생은, 괴롭힘이라는 ‘원죄’에 의존하고 있으며, 관객에 대한 그 죄의 무자각성을 비판한 듯했습니다. 극중에서는 그것이 무언가 저주처럼 주인공에게 덮쳐옵니다. 아카타로의 억울하고 답답한 일상이, 질투와 원한을 내포하고, 결국 그것이 거대한 집착으로 변모하여 주인공을 짓밟아갔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 저는 제 자신을 결코 무심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집단 사회에서 쏟아져 나온 문제아로 취급받고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 안위만을 생각하며 방관했던 때를 말할 때면, 저는 당시 제 스스로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곱씹어 보면서 제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천국에 올라가는 것처럼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제대로 마주치고 사과할 용기도 없습니다. 설령 사과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잃어버린 일상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 후 상대방의 삶을 억지로 안타깝게 여기고 걱정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을 잊은 듯 꾸며낸 것처럼 보일 뿐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변명만 계속 떠오르는 저 자신에 혐오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결국 그것은 맴돌기만 하고, 자존심 상한 감정으로 더욱 증폭되는 악순환일 뿐입니다.
우리는 외계인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다수론과는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임을 주장하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별 존재’ / ‘우리 우리’) 각 개인이 억울함을 느끼는 것처럼 억울함을 느끼는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특히 신경 쓰인 부분은
애니메이션의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2시간 동안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칭찬하는 만큼,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생각해 본 결과,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반과 중반은 정말 훌륭했지만, 막판은?
초반과 중반은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묘사가 매우 생생하고,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현실적이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막바지에 오히려, 성인이 된 아키타로의 묘사는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입적인 빈곤층으로 그려져, 약간 억지스러운 작가적인 면모가 느껴졌습니다. 성장 배경이 비참해 보이지만, 초반 중반만큼이나 완벽하고 치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된 연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덧붙여 순풍에 힘차게 자란 인간은 현실적으로 ‘아키타로’를 만날 기회가 없거나,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상대의 삶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에, 의도적으로 그것을 그대로 영상에 담아내면서, 상징적인 인물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막바지의 현실감을 깨뜨림으로써 ‘덧불처럼 만들어진 불확실한 아키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중산층 시선에서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부르주아적인 시점에 약간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코라쇼와 같은 세대인데, 코라쇼의 알람 시계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전’이라는 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거든요. 게다가 집에 피아노도 있고, 학원에도 다니고 하니까요. 공부에 열심인 가정이고, 엄격한 교육을 받은 것은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반항하고, 사소한 범죄를 어릴 적에 과장해서 생각하는 묘사는 매우 좋았습니다. 아카타로의 가정은 결코 부유하지 않다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특히 낡은 학습대에 스티커가 많이 붙어 있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각자의 가정 환경에서 자라온 결과로 인한 삶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경향성으로서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해피엔딩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제 기억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억눌린 인간을 자기가 상상한 대로 소설로 되살려내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너무 상류층의 시선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가진 자의 일방적인 구원’에 불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최근 마츠타미 미술관에서 열린 ‘로드, 괜찮으신가요?’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는 “로드(路上)”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정의하는 콘셉트 하에 다양한 전시가 있었는데, 특히 노숙자를 조명한 전시장에 주목했습니다. 다만, 운영 측에서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일 것입니다만,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권력을 과시하며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그 결과 안전한 영역을 구축하고, 그 안전한 영역에서 “로드”의 해방을 외치는 듯한 보편적인 느낌만 들었습니다(물론 이것이 다른 관점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억지로 약자를 동정하고 걱정하며, 선을 맹신하고 개혁에 매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해 왔습니다. 자신에게 특별한 시각이 있다는 자부심마저, 비꼬는 듯한 그들의 권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은 대체로 꽤 현명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신의 사상 왜곡도 미리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모순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은, 보통의 집착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일입니다.
매우 노골적인 작품
사전에 언급한 이야기는 제작 측에서 아마도 미리 염두에 둔 것일 겁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르주아적인 관점에서만 서 있다는 점, 그리고 그저 뻔한 긍정적인 이야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거죠. 그들의 죄책감을 포용하여, 오히려 그 끔찍한 구조에 대한 완결을 만들어낸다면, 극도로 탐욕스럽고 오만하게 느껴졌습니다. 간결하게 말하면, 관객에게 비판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고, 비판의 여지를 미리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에 대한 반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 축소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제작 측에서 스스로 진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씻어내는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죄’ 자체가 비판받을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원래부터 반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악의적이고 오만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평가를 받든, 모든 것이 이 작품과 제작 측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립니다. 뉘앙스에서는 말하지만, 이론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이것보다 더”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츠키시마 료의 ‘나를 껴안아줘’를 읽었습니다. 료의 섬세한 감정 묘사와 아름다운 문체가 훌륭했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고독과 상실감을 섬세하게 표현한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책을 읽으며 츠키시마 료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츠키시마 료는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는 보지 않으련다. 그것은 제 자신의 삶에 갇히는 느낌이 들기 때문도 있고, 더 이상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 “다시는 보지 않으련다”라는 감상이 이 작품에 대한 최대의 찬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note 원문
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17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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