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보폭대로 가면 돼”
쇼트쇼트 『반투명 하이킹』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랑과 자기 수용의 이야기.
제01장 - 반투명한 등
사그락, 사그락 마른 모래와 자갈을 밟는 구둣소리가 초가을의 고요한 산길에 작게 울리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트레킹폴 끝을 가볍게 흙에 짚으며,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장 편안한 보폭을 유지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를 불어 지나가는 바람은 피부에 기분 좋은 차가움을 띠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흔들리는 땅에서 마른 낙엽과 살짝 촉촉한 검은 흙의 냄새가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아, 이 냄새야.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콧속 깊은 곳을 간질이는 그리운 산의 내음에 꽉 조여 있던 가슴속이 부드럽게 풀려 갔다.
한때 남편과 산길을 달리는 마라톤에 참가하던 시절, 숨을 헐떡이며 맡았던 냄새였다. 당시에는 경치를 즐길 여유조차 없었지만, 그 서늘한 바람과 흙 냄새만큼은 몸속 깊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인터넷에서 낮은 산 등산 기사를 보고 문득 그 냄새를 다시 한번 맡아보고 싶어졌다. 휴일 아침에 문득 떠나온, 가을 공기를 만끽하기 위한 것뿐인 자유로운 혼자 걷기였다.
멈춰 서서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른다. 나무 사이로 엿보이는 능선 왼쪽에는 발아래로 펼쳐진 시가지와, 그 너머로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발밑으로 시선을 내리던 바로 그때였다.
풍화로 희게 된 바윗결이 깎인 등산로 위에, 옅은 호박색의 둥근 것이 하나 덩그러니 굴러 있었다. 윤기 있게 빛나는 동글동글 둥근 도토리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닥의 모래와 자갈이 비쳐 보일 정도로 옅은 반투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도토리?
초가을의 산이라면 진귀할 것도 없었을はず다. 하지만 투명한 그 신비로운 자태에 이끌려, 내 발걸음은 절로 멈췄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발치에 떨어져 있던 열매를 집어 올리려 살며시 손끝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뿐히. 손끝이 닿자마자 도토리는 단단한 껍질의 감촉조차 남기지 않은 채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의 입자로 풀어졌다. 그리고 가을 바람 속에 사르르 녹아들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손끝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손끝과 손바닥 안쪽에는 마치 햇볕에 데워진 조약돌을 꽉 쥐고 있던 뒤처럼 은근히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의 여운만이 확실히 남아 있었다.
고개를 들자 시선 끝에는, 하나, 또 하나, 마치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것처럼 반투명한 도토리가 등산로 한가운데에 점점이 은은한 빛을 밝히며 이어져 있었다.
그때, 앞쪽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속에서 마른 잎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불과 10미터쯤 앞, 능선이 완만하게 굽어지는 나무들 틈새로 무언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너구리?
통통하고 작고 둥근 실루엣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번진 듯 살짝 투명했다. 목 뒤에 두른 수건은 무언가를 품은 듯 빵빵하게 부풀어 있어 봉제 인형처럼 보이기도 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림자가 작은 몸을 흔들며 총총 달릴 때마다, 매듭 틈새로 그 반투명한 도토리가 툭, 툭 흘러 떨어졌다. 너무 많이 주워 모은 나머지 다 끌어안지 못하는 듯했다. 떨어진 도토리는 땅에 닿아서도 은은한 빛을 띤 채 그 자리에 머물렀고, 그 너무도 서툴고 필사적인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질 뻔했다.
그림자가 잰걸음으로 나무 사이 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 나는 다시 나만의 차분한 걸음으로 한 걸음씩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일렁이는 등산로를 바스락, 바스락 발소리를 내며 나아간다. 시야 너머 나무들의 장막을 지나 나타난 능선 오르막 입구에 문득 누군가의 뒷모습이 겹쳐지듯 나타났다.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한 등산자의 뒷모습. 초가을의 강한 햇살을 받은 그 모습은 나무들의 푸르름을 등에 비춘 듯 어딘가 희미하게 투명해 보였다.
낯선 뒷모습일はず였는데. 그런데 가슴속이 쿡 조여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Chapter 02 - 저건, 나다
경사가 가팔라진 산길에서 마른 흰 모래자갈이 사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다.
능선길은 어느새 풍화된 화강암이 그대로 드러난 험준한 오르막으로 바뀌어 있었다. 밑창에 힘을 주지 않으면 고운 모래와 작은 돌에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것 같았다. 나는 트레킹 폴을 경사면에 단단히 박아 넣고 한 걸음씩 발디딤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비탈길을 올라갔다.
발밑에는 여전히 그 반투명한 도토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점점이 이어져 있다. 목 뒤에 두른 수건에서 이것들을 흘리며 갔던, 그 작은 그림자가 남긴 이정표를 따라가듯이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약 20미터 앞, 하얀 바위 표면이 빛을 반사하는 가파른 언덕을 저 뒷모습이 오르고 있었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인데도 그 뒷모습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어깨를 작게 들썩이면서도 쉬지 않고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다.
주변의 나무들이나 맑게 갠 가을 하늘 풍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발밑만 바라보며 걷는 뒷모습이었다. 마치 멈춰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를 잡지 못한 채 무리해서 오를 때의 걸음걸이였다.
——알고 있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저렇게, 누군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무리해서 걸음을 재촉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그런 걸음걸이를,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폴을 든 손에 힘을 준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빛의 온기가 폴을 쥔 손가락 사이로 스며나와 나를 감싸왔다.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오래된 기억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이건…… 사회에 갓 발을 들였던, 그 시절의…….
당시의 나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극심한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요령 있게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나는 소심해서 남의 눈치만 보느라 무엇을 해도 잘 풀리지 않았다.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고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가슴속으로는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더 빨리, 더 제대로, 더 주변 사람들과 똑같아지지 않으면 안 돼. 더, 더…….
그렇게 무리하게 누군가를 흉내 내며 발돋움하다가 스스로를 소모시켜 갔다. 자신의 장점은 하나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믿어버린 채 무리를 거듭하다 완전히 지쳐 버렸다. 그렇게 멈춰 서기를 반복하며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꽉 쥔 손바닥 안에서 부드러운 온기가 조용히 고동치고 있었다. 천천히 힘을 풀자 손바닥 안에서 은은한 빛이 동그랗게 작은 반투명한 도토리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손가락을 펼치자 그것은 살랑이며 빛의 입자로 풀려 흩어져 갔다.
그 시절 나는 무리하게 누군가처럼 되려고 애쓰다가 나 자신만의 걷는 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헉 하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앞쪽에서, 그 뒷모습이 가파른 언덕을 다 오른 참이었다.
경사가 끝나 능선의 바위 지대로 빠져나온 곳. 강한 가을빛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두 발이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듯 엉키며 멈췄다. 자신의 페이스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서둘러 오르기만 하던 몸이, 뚝 실이 끊어지듯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너지듯 웅크렸다.
“……아”
마른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이어졌다.
온 세상을 뒤져봐도, 저렇게 누군가에게 버려지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서두르다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모른다. “지금의 나로서는 안 된다”며, 저렇게 자신을 계속 몰아붙이던 것은——.
저건——나야.
제3장 - 반투명한 도토리
마지막 한 걸음을 힘껏 내딛으며, 나는 가파른 언덕을 다 올라갔다. 경사가 사라지고, 시야가 단숨에 끝까지 트였다. 뺨을 스쳐 가는 가을바람은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빨려 들어갈 듯 아득히 높은 푸른 하늘. 발밑에서 뻗어 나가는 능선 너머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와 작게 늘어선 마을 풍경이 아득히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능선 위는 이토록 고요하고 드넓은 세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눈부신 가을빛 한가운데에서 한 등산자가 하얀 바윗결 위에 무너지듯 웅크리고 있었다. 양팔로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등을 둥글게 말고 작게 떨고 있었다. 살짝 투명한 그 몸은 초가을의 강한 햇살을 받으며, 마치 지금이라도 바람에 녹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웅크린 그녀의 발밑, 흰 화강암 바위 표면 위에는 무수한 반투명한 도토리가 흩어져 있었다. 옅은 호박색 빛을 발하며 그녀를 둘러싸듯 바닥에 구르는 그 빛의 알갱이들 한가운데에 작고 통통하고 둥근 그림자가 있었다.
목 뒤에 두르고 있던 수건이 풀려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작은 몸은 수건의 끝자락을 입에 문 채 짧은 앞발을 이용해 흩어진 도토리를 하나씩 열심히 그녀의 발밑으로 굴려 모으고 있었다. 도토리가 수건에서 떨어질 때마다 허둥지둥 그것을 쫓아갔다. 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토리를 기어이 그녀에게 전해주려는 듯했다.
서툴고 더듬거리면서도, 그 작은 존재는 줄곧 모아 주고 있었다. 앞만 바라본 채 발밑을 노려보며 울면서 급히 올라오는 그녀의 발자취에서 흘리고 간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워 모으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다가가 발밑에 굴러 있던 도토리 하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투명하고 동글동글하다. 살며시 손끝을 뻗어 그 은은한 빛에 닿는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의 나는 소심한 것도 요령 없는 것도 모두 ‘고쳐야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처럼 빠르고 능숙하게 걷지 못하는 나 자신을 줄곧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차갑게 식어 있던 그 시절의 마음을 살며시 감싸준다.
서툴렀기에 오히려 묵묵히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소심했기에 오히려 누군가의 아픔에 함께할 수 있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을 되풀이했기에 오히려 타인의 약함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단점이라 단정 짓고 버리려 했던 바로 그것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매력이었다. 가치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작은 그림자는 다 모아 놓은 도토리 무더기를 바라보더니 휙 돌아서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흐릿하게 번진 사랑스러운 그 모습은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듯 하더니 가을빛 속에 녹아들 듯 조용히 사라져 갔다.
——주변에 무리하게 맞출 필요는 없어.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보폭이 있어.
나는 양손에 들고 있던 트레킹 폴을 살며시 발밑의 바위에 기대어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장 차분한 보폭으로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4장 - 나의 보폭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바로 옆에 조용히 앉았다. 차가운 능선의 바람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발밑만 노려본 채, 멈춰 서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날의 나.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도토리에서 스며 나온 온기가 지금도 손끝에 은근히 남아 있었다.
——자신의 보폭대로 가면 돼.
가을의 맑은 공기에 그 말을 살며시 건넸다. 무리하게 큰 걸음으로 걸을 필요도, 누군가의 등을 무작정 쫓아갈 필요도 없다. 설령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비틀거려 멈춰 서는 일이 있더라도, 나에게는 나만의 보폭이 있다.
투명했던 그녀의 윤곽이 조용히 풀어져 간다. 따스한 빛의 입자가 되어 바람에 실려 날아오르더니, 스르르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발밑에 남겨져 있던 호박빛 도토리들도 한 알씩 은은한 빛을 발하며, 맑게 트인 푸른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라간다.
올려다보니 끝없이 높고 깊은 가을의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능선을 넘어오는 바람은 상쾌했고, 가슴 깊은 곳에는 확실한 온기가 가득했다. 서툴게 살아가던 시절의 나를 이제야 마중하러 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발밑에 둔 트레킹 폴을 손에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나는 내 보폭으로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출처: note 원문
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56청크
원문 보기 | 출처: no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