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을까.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괴물로부터, 감염자로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잭 크레거 감독의 ‘바이오 해저드’를 끝마친 후,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런 솔직한 감상이었다. “나는 생명을 지키고 있어.” 이 영화의 주인공 브라이언이 내뱉는 이 대사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장기나 의료 용품을 운송하는 운전사이다.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물건을 운반하는, 문자 그대로 ‘생명을 맡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임신한 연인 미셸이 있다. 곧 태어날 새로운 생명을 지탱하고, 아버지로서의 또 다른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는 중화제의 담긴 의료 가방을 수송한다는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가방의 행방에는 수많은 인간의 생사와 죽음, 래쿤시티,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 즉 그는 직업상의 책임, 아버지로서의 책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책임, 세 가지 의미로 “생명을 지키는 남자”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어떤 것에도 결코 굳건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이라는 것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변명하고, 당황하고, 판단을 엉뚱하게 하고, 끊임없이 도망친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괴물에게 찢겨 죽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인생이, 더 이상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닌 될 것이라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임신한 연인 미셸이다. 그가 “나는 생명을 지키고 있어”
그녀는 외마디 외침을 지진처럼 뱉어내면서도, 자신의 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직감한다. 브라이언이 비유적이든, 혹은 업무상의 사명으로서 이야기하는 “생명을 운반하는” 행위를 그녀는 흔들림 없는 육체적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 대비는 너무나 잔혹하고, 너무나 이기적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는 순간, 그녀에게 “아이를 낳아줘”라고 말한다. 얼마나 무책임한 짓일까.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고, 태어나는 아이를 기르거나 연인과 함께 인생을 함께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고 자신의 부재 이후의 모든 것을 책임져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음을 앞둔 남자의 절실한 간절함, 혹은 미래를 기댈 수 있는 감동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녀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바이오해저드”와 같다. 잉태하는 것은 그가 아니며, 키우는 것도, 남겨지는 것도 그가 아니다. 생명을 운반하는 것과 그 생명에 책임을 지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이 작품은 이러한 흔한 사실을, 극도로 혐오스러운 호러 영화의 형식을 빌려 우리에게 突きつけてくる 것이다. 이 영화를 더욱 음침하게 만드는 것은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떨어지는”, “놓아주는” 이미지이다. 사람이 떨어진다. 물건이 떨어진다. 생명을 구해야 할 것이 떨어져 나온다. 총으로 머리를 겨누고도 죽지 않았던 괴물이 “놓아주는” 행위로 “죽일” 수 있다. 주인공은 무언가를 지키거나 얻으려 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일본어에는 또 다른 “놓아주는” 표현이 있다. “堕す(오스)”
그것은 있다. 낙하, 낙몽, 낙태. 이러한 이미지가 임신이라는 이야기의 출발점과 겹칠 때, 단순한 생존 호러였을 법한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작품 속 모든 낙하를 낙태의 은유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강행책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명을 운반하는 것’이 강조되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떨어뜨리는’ 행위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장면에서는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오른다. ‘자살’이라는 결말이다. 감염으로 인해 인간성을 잃고 괴물로 변모해가는 몸.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는 통제할 수 없는 육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선택지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으려 한다. 그 결과, 자신을 구해야 했던 치료의 기회를 잃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하는 가능성마저 파괴해버린다. 이것은 생존 본능의 비극인가, 아니면 자신의 목숨을 놓아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남자의 궁극적인 무책임인가.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삶에 대한 희망이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그 선택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었던 많은 생명이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자, “나는 생명을 운반하고 있다”라는 그의 주장은 몹시 공허하게 느껴진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갔던 남자가, 결국에는 생명을 빼앗는 존재가 된다. 정말 끔찍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런데, 원래 ‘바이오하먼트’라는 작품의 원제는 ‘Resident Evil’인 것도 이번 영화를 생각할 때 흥미롭다. ‘Resident Evil’. 직역하면
“내면에 깃든 악”. 혹은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악”,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악의 존재”(게임의 첫작이 낡은 저택이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좋은 번역이었기 때문에 Gemini, ChatGPT의 번역을 참고한다). 일본의 ‘바이오 해저드’가 생물학적인 재앙, 즉 외부에서 덮쳐오는 위협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Resident Evil’이라는 단어에는 원래 우리 내면에 잠재된 악이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 있다. 물론 시리즈 제목이 처음부터 인간의 책임론을 의도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크 그레거는 이 제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끔찍한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인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하며 계속 살아남는 인간인가 (여기서부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뒤에 언급될 ‘무기’와도 관련이 있다). 괴물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괴물은 원래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크 그레거가 ‘바이오 해저드’라는 거대한 프랜차이즈를 기존 인기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한 남자 주인공의 처량한 도피극으로 완전히 재해석한 이유도 납득이 된다. 돌이켜보면 자크 그레거 감독은 장편 데뷔작 ‘바바리안’부터 시작해서 정말 기묘한 영화였다. 세 가지 다른 시점, 시대, 계층을 횡단하면서 공포와 코미디의 경계를 과감하게 넘나들며 관객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전제를 끊임없이 파괴한다. ‘바바리안’의 결정적인 혁신은 단순히 “예상을 뒤엎는 전개”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 한 사람에게는 공포가 일상인 반면, 다른 사람에게는 공포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는 시점의 불균형 자체를 오락의 토대로 확립시킨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불균형의 배경에는 성별, 계층, 권력, 착취와 같은 사회적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어지는 『웨폰즈』에서도 그 시선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웨포나이즈, 즉 무기화되고 비인간화되는 아이들. 정체성의 박탈을 상징하는 얼굴의 파괴.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가부장제, 그리고 청소년 돌봄자라는 현실. 일견 荒唐無稽한 괴담 속에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돌봄과 지배, 의존과 착취의 관계가, 집요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이 감독은 호러 영화에 사회 문제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사회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공포스러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본다.
『바이오해저드』에서도 주인공이 지는 책임은 단순한 드라마상의 설정이 아니다. 일, 가족, 임신, 출산, 육아, 그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 모두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찌나게도 감당해야 할 것들뿐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그것을 포기했을 때, 그 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연인이고, 아이이며, 동료이고, 사회이며, 때로는 낯선 사람이다. 어떤 생명체에도 삶이 있다. 괴물에게 찢겨 죽는 인간에게, 감염으로 인해 모습이 변한 인간에게, 주인공이 기다리는 장기를 가진 환자에게,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각각의 삶이 있다. 그것을 주인공의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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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2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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