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과 인지의 틈에서 이해 가능한 현실이 소비되거나, [영화 리뷰] “Digger/디거 / Digger”(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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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10-21T03:39:27.83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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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Digger 2026년 미국·영국·멕시코 합작, 128분 ★★★★☆ (걸작, 놓치면 손해) 감독: 알레한드로 고뉴스레스 이냐리투, 각본: 알레한드로 고뉴스레스 이냐리투/알렉산더 디네라리스/니콜라스 자코본/사비나 버만, 출연: 톰 크루즈/리즈 아메드/존 굿맨/잔드라 하이러/마이클 스타일버그/제시 프리몬스

톰 크루즈 주연의 알레한드로 고뉴스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최근 화제작 ‘디거’를 관람했다.

“버드맨 혹은 (무지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가져온다)”와 “레베넌트: 蘇えりし者”로 2년 연속 아카데미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한 명작가 이냐리토와, 오스카 수상은 못했지만 마지막 거물 톰 크루즈의 합작으로 워너의 올해 주요 작품으로, 개봉 전에는 오스카 주요 부문 최우선 후보 중 하나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개봉되자 끔찍한 실패를 기록했다.

먼저, 흥행적으로는 역사적인 대실패가 거의 확정된 상황이다. 10월 16일 기준으로 북미 흥행 수익은 약 166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약 4110만 달러이다. 북미 첫 주 800만 달러에서 2주차에는 60% 하락하여, 당초 1억 2500만 달러로 책정되었던 제작비는 최종적으로 1억 6000만 달러에서 1억 8000만 달러까지 불어난 것으로도 보도되고 있다. 더불어 광고비가 약 1억 달러, 세계 흥행 수익 3억 5000만 달러 정도가 손익분기선으로 설정되었으며, Variety는 최종적으로 2억 4500만 달러 상당의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보도했다. 제작비보다 손실이 더 많은 구조 자체가 어색하지만, 아마도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홍보 비용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 남을 대참사 같은 사건이다.

일본에서도 개봉 첫 주 관객 동원 랭크 7위를 기록했다. 같은 날 개봉한 “바이오해저드”의 뒤를 잇는 것뿐만 아니라, 전주에 화려하게 공개되었지만 평판이 극도로 좋지었던 2주 차 “디스클로저 데이”를 좇는데 겨우 10명 정도를 채웠다. 10월 12일 연휴 마지막 날, TOHO 시네마즈 입티벌점에서 IMAX관에서 관람했는데, 오전 9시 10분이라는 악조건을 감안해도 관객은 턱없이 부족했고, 대략 세어보니 1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오전 10시 영화제와 같은 시간대였음에도 토요일, 일요일과 비슷한 관객 수만 보였기에, 새로운 톰 크루즈 영화로서 조금도 이익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편, 필마크나 노트에서 살펴보니 일본에는 반드시 악평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상들이 더 눈에 띄었다. 관객 동원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일까. 다만, 손쉬운 칭찬은 의외로 적고, 최고작!이라고까지는 표현하지 않지만, 독이 있고 재미있는, 정도의 긍정적인 평가가 평균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복잡한 구조의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흔히 보이는 “어렵고 이해가 안 갔다”라는 감상이,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리뷰를 살펴보면, 무엇을 깨달았는지 경악할 정도로 다르게 나타난다.

악덕 석유왕이 세계를 파멸로 이끈다는 정치 풍자라는 의견이 있는 사람도 있다. Digger의 연설을 듣고 “자본가뿐만 아니라 소비자도 공범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곳에서 에어컨이나 온라인 쇼핑을 자제하고 “관객 스스로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영화”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옳지만 설교처럼 느껴져서 더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했다는 의견도 있는가 하면, “톰 크루즈를 보러 왔는데, 정치 설교를 듣러 온 것이 아니었다”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극중극이 되는 장면을 영화 최대의 반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사실 모든 것이 허구였기 때문에, 구원해야 할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동화적인 이야기다”라고 전부 요약하는 사람, 모든 방향으로 독설을 쏟아내는 악랄한 유머를 칭찬하는 사람, 미래 사회에서는 부유층이 정보와 인간의 생명까지 지배할 것이라는 반전을 구축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와 같이 진범을 찾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존재했던 디거(Digger), 무대 위의 디거, 그리고 그것을 연기한 카티스의 계층을 파괴하고, 디거 자체가 극을 통해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있다는 이론까지 등장한다. 예술이 남아있음을 희망으로 읽는 사람도 있고, “Fossil Fools”를 사회의 불만을 처리하는 가스 밸브와 읽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디스토피아적인 외부 세계의 묘사를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경고로 읽는 사람도 있고, 무엇을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오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지나친 표현일 수 있지만, 그렇게 명확한 “정답”이라고 보기에는 훨씬 더 많은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이 단지 다층적인 영화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정답”에는 영화가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직관적인 해석도 섞여 있으며, 예술을 희망으로 보거나, 혹은 해소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양쪽 모두 타당한 해석도 존재한다. 다만, 많은 감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화의 중간에 하나의 명확한 설명을 얻게 되면, 그것을 “지금 나에게는 이렇게 보이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이 영화는こういう映画이었다”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정보는 처음의 인식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답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간다.

그러다 “디거”가 의도적으로 설명을 생략하여 난해하게 만들고 있으니,こういう 해석이 통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맞지 않다. 한 장면 한 장면 보아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작품으로서의 관점에서는 매우 친절한 편이다. 도입부의 정치 풍자도 무엇을 웃고 있는지 명백하고,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 또한 시작 후 20분 정도 안에 분명해진다. “디거”의 장황한 연설은 힘찬 것뿐만 아니라 논리가 명쾌하고, 뒤이어 “포시ъл 풀즈”가 과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연극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연극을 만드는 의미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결국 그 사건 이후 삶을 살아가는 세계까지 보여준다. 의미 없는 조각들을 던져 관객에게 해독하게 하는 스타일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이유에서, 사람은 중간에 사고를 멈추게 된다.

정치 풍자를 알 수 있다. 옴니버스 드라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가가 유일하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비자는 또한 가해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구원하지 못해도 인간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가, 그것으로 해서 영화 한 편을 설명해 보일 만큼 강렬하다. 관객은 수없이 “なるほど” (이해하겠다)를 되풀이하며, 그럴 때마다 영화를 끝낼 수 있다.

또한, 이 문제는 사실 영화의 비교적 초반부에서 거의 그대로 언어화되어 있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디거는 “말은 인식이다. 그리고 인식こそ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이에 반대하는 간슈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인식은 인식이다”라고 반박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디거가 “그들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직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디거에게 중요한 것은 발생한 사실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며, 그 이해는 언어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다. 반면 간슈는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사실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현재 직면한 파국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는 간슈가 훨씬 더 정확하다. 그러나 “디거”라는 영화 자체는 그 이후 전개 과정에서 사실만으로는 인간은 살아갈 수 없으며, 그것을 이야기로 바꾸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이해한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그동안 저는 이 혼란의 원인이 영화에 내재된 구조의 미흡한 명확성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결함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교한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관객에게 구조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영화로서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복잡한 것을 복잡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전달하는 것은 기술입니다. “몰라 당황한 관객이 잘못”이라고 치부한다면 제작진은 무적 신세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대중 예술에게는 어리석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냐리투 본인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러한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이 기획의 출발점은 권력을 가진 자의 말이 사람들을 오도하고, 그 말이 전달하는 바를 사람들이 현실로 믿게 된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이 듣는 이야기가 현실로 변하고, 자신들이 누군가의 말이나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 속에서 싸우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영화 중간에 보이는 것의 의미를 여러 번 바꾸는 구조에 대해서도, 벽을 조금씩 허물어내면서 ‘우리 자신은 이야기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관객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사람들이 하나의 현실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에 있으며,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만을 가지고 다니며, 누군가 “이렇게 된다”라고 말하면 그것을 멈춰서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지적했다. 특히 이민 문제를 예로 들어, 복잡한 현실에 대해 간단한 답이 제시되면 사람들이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단순한 답변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는 영화를 본 후에 감독이 억지스러운 해설을 덧붙인 것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작품의 본인이 제시하는 설명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하지 않지만, “Digger”의 기묘한 구조와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만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이해받는 데 실패했다’라고 보기보다는, 처음부터 하나의 이해로 좁혀지도록 하는 의도가 부족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오히려, 명확한 설명을 연이어 제시하며 관객이 그것에 쉽게 귀결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시작 부분에서는 탐욕스러운 석유왕과 어리석은 대통령,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세력을 나열하며 “이들이 몹시 잘못했다”는 매우 만족스러운 설명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풍자극 ‘Fossil Fools’였다. 다음으로, 극 중에서 디거가 “너희들이 기름을 갈망하게 만들었다”고 연설하며 “그렇다, 소비자 또한 공범이었다”는 약간 현명해지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설명이 제시된다. 이후 극 중의 디거는 과장된 디거로서, 실제 인물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비판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더불어 극을 제작자들의 인식 차이, 관객들이 처한 위치, 그리고 결국 극장 밖의 현실까지 드러나간다. 한 장을 뜯을 때마다 새로운 “진실”이 나타나고, 그것 또한 순식간에 하나의 관점으로 변해간다.

디거의 연설에 멈춰버린 사람들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 수도 있다. 그 연설은 멈춰버리게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강렬하고, 매우 설득력 있으며, 자신도 약간 반성하게 만들고,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인간은 복잡한 현실보다 의미 있는 설명을 더 좋아한다. 자신을 납득시키는 이야기를 얻게 되면, 그 이후의 사실들을 그 이야기 속에 녹여내기 시작한다. “디거”는 그 구조를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관객 스스로를 그 함정에 빠뜨리는 것을 의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도출된 주요 가설이다.

그러면서 워너가 이 영화에 냈던 황당한 홍보가 더욱 기묘한 교훈을 주게 된다.

워너는 미국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풀어낸 재앙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에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임을 증명하려는 남자”라는 공식 로고 라인으로 “Digger”를 판매했다. 일본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掘れ。世界を救うために。” “세계(을) 구(하기) 위해 일어서라”라고 홍보하고 있다. 예고 보도에서도 “세계(을) 종말(하게) 만드는 석유왕”, “생태계의 대재앙을 초래한 억만장자”라는 소개가 앞면으로 나온다. 즉 관객은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 전에도 “Fossil Fools”가 제시하는 Digger 이미지를 “Digger”라는 영화의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조장되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이냐리투가 의도한 설정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워너가 판매가 어려운 영화를 판매하기 위해 감정적인 유혹에 의존한 것일 뿐일 것이다. 다만, 영화가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명확한 ‘단순한 답’을 현실의 프로모션 전략이 재연해버린 것은 아이러니라는 수밖에 없다. 복잡한 작품에서 하나의 쉬운 筋을 뽑아내 그것을 “이 영화는こういうものです”라고 전 세계로 유통시키는 것이다. 관객은 그 설명을 가지고 영화관에 들어가, 본편이 20분 후에 그것을 수정해도 처음의 인식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말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이 사실보다 강해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해외 비평가들의 격렬한 거부 반응은 관객의 지나치게 빠른 ‘이해’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Variety는 작품을 자만심에 가득 찬 풍자극으로 혹평했고, TheWrap은 “오만함”, “자만심”, “자기 긍정적” 등으로 공격했다. 쉽게 말해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감정적인 비평이다. Roger Ebert.com도 인간미가 부족하고 자기 만족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The Playlist처럼 이 영화가 관객의 거부 반응을 역설적으로 받아들이고 단순한 풍자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각의 비평가도 있다.

“오만하다”는 비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관객이 단순한 설명으로 뛰어드는 함정을 파놓고, 그렇게 뛰어든 사람을 “저도 현실을 단순화했구나”라고 훑어보는 행태 자체가 혐오스럽다. 풍자가 단순하다고 비난받는다면, 그 단순함은 극 중 극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설교처럼 들린다고 비판받는다면, 그 설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관객까지 작품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술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자신에 대한 비판까지 작품 안에 미리 넣어두는 구조는 상당한 얄미움이다.

단지 현실 수용을 보면 정말 다들 걸려 있다. 여기가 까다롭다.

관객은 바보라고 웃으며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도 처음 봤을 때, 수많은 장면에서 “이해했다, 이렇게 된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개들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했기 때문에, 뜬금없이 여러 가지 시선을 흩뿌리는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巷(하읕)의 리뷰를 읽기 시작했을 때도 “이런 해석은 틀렸다”, “이러한 분석이 더 논리적이다”라며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분류하고, 점점 자신만이 옳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考察에 몰두하는 사람을 곁에서 보면서 “중요한 것은 숨겨진 설정이 아니라 구조다”라고 말하면, 좀 더 지적으로 들릴 수 있다. Digger의 연설에서 멈추는 사람에게는 극본상의 Digger의 대사라는 점에서 “Fossil Fools”가 그에게 그렇게 말하게 하는 이유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사실과 인식의 괴리こそ作品の中心だ”라고 요약하면 어느 정도 모든 것이 깔끔하게 연결되는 것 같다.

물론, 다르다. 그것이 옳지 않다.

어쩌면 그곳에서 만족하면 결국 똑같은 일이다. 이냐리투의 인터뷰를 읽고 “저러다 정말 사실과 인식의 문제가 중요했던 거잖아”라며 승리하는 모습 또한 위험하다. 감독의 발언 역시 이 영화에 대해 언급된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그것을 영화보다 더 나은 현실로 취급한 순간, “누구의 말이 현실을 만든다”는 경고를 내뱉으면서 자신 또한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영화에는 정답이 없다. 그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가뿐만 아니라 소비자 또한 공범이다”라는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의 구조를 고려하면 진지한 시각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이 영화가 극중극이라는 형식 자체를 선택했다면, “왜 극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비극을 25년 뒤의 인간이 다시 연기하고, 실제 인물을 단순한 악역으로 재해석하며, 관객이 웃고, 분노하고, 환호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극을 만들고 과거를 이야기로 바꾼다. 창작은 기억인가, 위로인가, 도피인가, 사회의 가스 밸브인가. 복잡한 사건을 이해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동시에, 그 순간에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것은 극장의 관객만을 위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영화를 두 시간 동안 본 후에도 우리는 “이것은 ○○에 관한 영화였다”라고 설명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리뷰를 쓰는 행위 자체도 여러 가지 복잡하고 모순된 두 시간을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Digger”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하려 할수록 “Fossil Fools”를 짓궂게 만들고 있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첫 번째 질문으로 귀결된다. 사실과 인식을 고의적으로 혼동시키고 오해를 유도하는 영화를 고의적으로 만드는 의미가 있는 걸까.

평범한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관객이 다른 곳에서 차례차례 의미를 확정하고 원래의 구조를 잃게 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관객이 다른 곳에서 차례차례 의미를 확정하고 원래의 구조를 잃게 되면, 그것은 소통의 실패이다. 게다가 “Digger”는 작가주의적인 실험 영화가 아니다. 제작과 홍보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를 주인공으로 캐고, 결과적으로 2억 달러를 넘는 손실까지 예상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관객을 혼란시키는 실험을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남는다.

그렇다고 지금은 확실히 “何か”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만약 언어가 현실을 만들고,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설명만을 선택하여 복잡한 사실을 하나의 단순한 이야기로 바꾸어 살아가게 된다면, 그 위험을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영화를 만들어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영화의 주장을 이해하고, “그래, 단순화는 잘못이다”라고 납득한 순간, 또 다시 하나의 쉬운 답을 소비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디거”는 더욱 교묘하게 접근했다. 관객들이 안심하고 탑승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설명을 준비하고, 각각의 설명을 중간 정도까지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탑승하고, 탑승한 후 굳이 梯子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오지 않고 그 설명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으며, 또 다른 설명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상황까지 포함하여, 우리가 현재 현실에 대해 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의 위기감은 기후 변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론, 석유왕, 트럼프식 정치, 자본주의 등 한 개인이나 특정 흐름, 이념에만 그 원인을 돌릴 수는 없다. 누군가가 제시한 명확한 설명에 귀 기울여 “알겠다”라고 느끼는 순간, 스스로가 그 위기 속에서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거만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만한” 장치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올라타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사실 영화를 끝낸 직후, 나는 “Digger”를 매우 적극적이고 훌륭한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어졌습니다. 이후, 엄청난 양의 리뷰를 읽어보니, 너무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고 “이렇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사실은 훌륭한 영화는 아닌 것일까”라는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전해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까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냐리투가 영화를 만드는 것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다. 그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간슈가 말하듯이, 인식은 오직 인식일 뿐이며, 사실은 사실로서 확실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맨땅에 드러내놓고 인식할 수 없다. 언어, 이야기, 영상 등을 통해 자신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변환한 후에야 비로소 “현실”로 받아들인다. 문제 있는 것은 중재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중재를 잊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을 사실 그 자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창작은 위험한 동시에 필요하다. 현실을 단순화하고 왜곡할 수 있지만,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이야기로 변환하는지, 그 과정 자체를 보여줄 수도 있다. “Fossil Fools”는 25년 전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고, “Digger”는 더욱 그 희극을 보고 있는 인간까지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사실과 인식 사이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또한 영화를 만드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냐리투는 앞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머다”라고 말했었다. 상당히 유리한 궤적의 이야기꾼처럼 보이지만, 정답을 뻔하게 내놓는 대신, 자신이 믿는 이야기나 자신으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때로는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25년 후에 겪은 ‘포시콜즈(Fossil Fools)’라는 희극을 만들어 공연하는 것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의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보는 것에도, 적어도 그 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다.

**출처:** [note 원문](https://note.com/sho_h5/n/nb0706341e105)

*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33청크*

[원문 보기](https://note.com/sho_h5/n/nb0706341e105) | 출처: no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