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지 못하는 아이들 2026년, 일본 (150분, 최고 평가 ★★★★☆)
감독: 다나카 미와
각본: 다나카 미와
출연: 미노리 마츠모토 / 이카이토 후미 / 유야마 료이치로 / 사카토 다이타 / 오카다 선페이 / 료호 히로시 / 료코 히로시 / 타나카 유키 / 요시다 얀 / 코바야시 세이주 / 이와타 류몬 / 스이바시 소라지 / 부치나 히나타 / 타케노아이 요토 / 사쿠라이 마이 / 츠미키 미호 / 하나세 코토네 / 북무라 유키야
(먼저 말씀드리지만, 매우 길다.)
시네마리스에서 히야코 미와카의 신작 영화 “나를 모르는 아이들”을 봤다.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감동받았다. 니시카와 씨의 영화를 보고 이렇게 솔직하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의외였다.
시죠칸 씨의 영화는 인간의 약점과 추함을 자비 없이 묘사하며 등장인물이나 관객에게 쉽고 간단한 구원을 주지 않는 작품이다. “뱀베리”와 “흔들리는” 이후 그의 날카로운 면모에 매료된 입장에서, 이번 신작의 연출에 다소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감성적이고 관객의 감정에 직접 호소한다. 바로 시죠칸 씨가 이렇게 영화를 찍게 된 건가 하는 놀라움이 있었다.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다. 연출이 아예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자르는 부분은 대체로 짧게 잘렸지만, 매우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엉성한 부분이 전혀 없다.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고려하면 여러 가지 의문점과 논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삶, 여성에 대한 억압, 식민지 지배, 전후 계층 격차, 귀환병의 정신적 상처, 암시장을 비롯한 범죄 조직의 세계 등 다루려는 문제가 너무 많아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서는 진심으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느꼈다. 다만, 성격이 나쁜 내가 어딘가 성격이 나쁜 듯한(실례) 시노가와 씨의 영화를 보면서, 왜 이렇게 감동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영화 마치 보고, 상점에서 브로셔를 샀다. 믿을 수 없는 100페이지 분량의 웅장한 브로셔였다. 조금 놀라웠다. 사실 브로셔를 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아마도 인생에서 몇 번째 경험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이 영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담긴 방대한 프로덕션 노트를 읽고 영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전쟁으로 고통받은 아이들의 영화인 동시에, 그 아이들에 대해 어른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그린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전에 시가와 상이 연출해 온 영화들과의 연관성도 어느 정도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서 자란 니시카와 씨가 전쟁을 그리기 전까지
시키와상은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10년 정도 나이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히로시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가 전쟁이라는 주제에 느꼈던 무거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로시마에서는 반전 교육이나 평화 교육이 학교와 시민 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원폭 피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특정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에 갇힌 사람들만이 가진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평화 기념 자료관을 방문하며, 8월 6일을 특별한 날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쟁과 원폭의 기억은 일상 속에 존재하며, 특히 히로시마 시 중심가의 번화가에서 원폭 피해자 수용소 터(원폭돔)를 발견할 때면 쉽게 외면할 수 없다. 히로시마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당연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 분위기에는 특유의 어색함이 함께 감돌았다. 전쟁이 또래에게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를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잊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강압적이고 강요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며, 그 노력 자체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 비극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 기억을 짊어지게 하는 것이 때로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니시카와 씨는 인터뷰에서 히로시마에서 평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비참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는 것의 고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때문에 니시카와 씨는 오랫동안 전쟁과 같은 무거운 소재를 의식적으로 피쳐왔다고 한다. 실제로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던 것 같다. 히로시마 출신의 영화 감독으로서 전쟁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변의 기대에도 저항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가 이번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전 작품인 “아름다운 세상”이었던 것이다. 원작에 오카자키 타카시의 “신분증”이 있었는데, 주인공인 미야가와는 전쟁 이후 혼란 속에서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로 살아남아 결국 범죄나 야쿠자 세계로 끌려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니시카와 씨는 그의 성장 과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쟁 이후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이후 어디로 갔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전쟁 고아는 전후 일본의 사진이나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알고 있더라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신발을 닦는 아이들, 역에서 잠자는 아이들, 어두운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이들. 그들은 전후 혼란을 상징하는 풍경으로 기억되어 왔지만,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성인이 되었는지 고민하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의 어리석은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영화 “나”는 처음에는 히야마 쓰키오카 씨 자신을 지칭했던 것이다. 전쟁과 원폭에 대해 공부해 온 자신에게도 알지 못했던 전후사라는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 그 발견을 통해 영화의 기획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주제에 접근하면서 니시카와 씨의 문제 의식은 더욱 확장되어 갔습니다. 전쟁 경험자가 줄어들고,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사회의 다수를 이루게 되면서,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졌습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 받아들였던 기억을 동일한 형태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그러한 질문들이 이 영화의 제작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입니다.
西川さんは、現在の小中学生にも観てもらえる戦争映画を作りたかったと語っている。ここには、広島で育った彼女自身の経験が強く反映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戦争の悲惨さを教えることの必要性を知りながら、その重さによって子どもたちが目を背けてしまうことも理解している。だからこそ、悲惨さを繰り返し見せるだけでは足りないと考えたのだろう。
그 선택은 영화의 스타일에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쟁 고아들의 모험과 여성이라는 것의 고난
1945년, 패전 직후의 도쿄. 음악가의 아버지를 두고, 비교적 풍족한 가정에서 자란 12세 소녀, 마에노 키즈코는, 소박하게 자리를 옮겨 스스로는 전쟁의 불길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집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여성이라는 것이 위험을 초래한다고 느낀 키즈코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소년의 옷을 입고 남자아이처럼 살아가는 것을 결심한다. 곧이어 같은 전쟁 고아인 스가시타 등과 만나, 어두운 시장을 관리하는 기자와부 밑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기타다 무오마치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영화는 아이들의 삶을 비참한 모습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도둑질을 하고, 교활함을 발휘하며, 어른들을 속이고, 잡히려 할 때마다 재빠르게 도망다니며, 또래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한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闇市에서의 삶에는 위험과 폭력이 뒤따르지만, 동시에 모험 영화처럼 활기 넘치는 모습도 있다.
여기, 이번 기시다 씨의 연출상의 중요한 선택이 있다. 아이들의 고난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의 생명력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영화가 필요로 하는 끔찍한 묘사라는 스테레오타입에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인다는 느낌도 준다. 관객은 아이들의 행동에 웃고, 때로는 그들의 대담함에 놀라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강요했던 전쟁과 사회의 부당함이, 오히려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킨코가 소녀라는 사실을 숨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정에는 지금까지 시즈카와 상의 작품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현실적인 여성의 시선이 담겨 있다.
긴지는, 어둠 속 시장에서 신발을 닦던 히로에가 몸을 팔 때의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강요되는지, 그 현실을 눈앞에 본 긴지는 자신이 같은 처지에 놓이는 것을 거부하려 했던 이유일 것이다. 소년으로 살아가는 선택에는 그런 그녀 자신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능숙하게 소년처럼 행동해도 몸의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첫 생리를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이 거부했던 삶과는 무관하게 여성으로 성장해가는 몸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 스에네 문미치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쟁 중, 교사로서 군국주의 교육에 가담했던 문미치에게는 패전으로 인해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관을 전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생아를 안고 직업을 잃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아기의 아버지는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물론이고 아이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사상을 가르친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 책임을 져야 하기 전에, 영아와 함께 혼자서 전쟁 이후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까지 강요받는 그녀의 처境은, 여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입은 막대한 피해가 패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는 여성임을 숨기며 살아가고, 문미지는 여성 신체를 이용당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살아남는다. 두 사람의 경험은 다르지만, 어느 쪽이든 여성이라는 사실이 개인의 삶을 크게 규정하는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는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서 일해 온 니시카와 씨의 개인적인 경험과 문제 의식도 담겨 있는 듯하다.
이번에 시노자와 씨는 그러한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명확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는 원래 인간의 약점이나 이기심을 그리는 데 능숙한 작가였으며,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을 영화의 중심에 두는 경향이 없었습니다. “멋지게 세계가 흘러가다” 정도부터 그 중심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전쟁이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강요한 부당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관객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연출이 늘어나는 것도, 그러한 문제의식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현황을 고려하면, 지금까지처럼 인물의 모순이나 속임수를 냉철하게 묘사할 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제작자로서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어 왔던 달덴누 형제나 켄 로치와 출발점이나 접근 방식이 다르지만, 최근 그들이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관객의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어딘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니시카와 씨의 작가성 후퇴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츠바치 가족’과 ‘아무도 모른다’에서 보이는 이헤다 씨의 연출과도 가까운 점을 느꼈다. 아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그리는 것이, 그들을 그러한 환경으로 몰아넣은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나아갔다. 인간의 따뜻함을 그리는 것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가 모든 면에서 성공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구원받는 아이와 구원받지 못하는 아이
이 작품에는 지나치게 많은 문제가 담겨 있다. 킨코와 문미子の 이야기는 하나의 영화로서 충분히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불법 시장의 소년들, 범죄 조직, 재일조선인, 전쟁으로 인해 정신을 병해 앓게 된 귀환병, 고아들까지 얽히게 된다. 전후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반영하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내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개별 문제가 충분히 심층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채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이들의 미래가 갈라져 가는 결말이었다.
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해 줄 어른들과 만나 다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구제에는 그녀의 가정 환경이 크게 얽혀 있다. 자는 집과 가족을 잃었지만, 전시에 음악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여 풍부한 교육 경험까지 잃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기 전의 걱정으로 친구에게 부탁했던 일이 그녀를 찾아내는 인물을 낳는다. 그녀의 가정이 원래 가지고 있던 문화 자본과 그로부터 형성된 사회 관계가 자의 구제에 크게 작용한다.
물론, 킨코가 소녀였던 것 또한 그녀를 보호하려는 어른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소년이었을 경우에도, 아버지의 친구가 계속 찾고 보호의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은 높았을 것이다. 킨코와 쇼교치의 미래를 가르는 것은 단순한 성별 차이보다, 전쟁 전부터 존재해 온 가정 환경이나 계층의 차이일 것이다.
한편, ஷᅩ하시오는 키카제 류의 세계로 들어간다. 킨코보다 훨씬 더 빨리 성숙한 판단력을 가지고, 동료를 보호하는 능력도 갖춘 소년이 사회적인 보호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지하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그곳에는 어쩌면 “스바라시키 세카이”의 산마보 같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영화의 기획이 산마보의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것을 고려하면, 두 작품은 여기서 연결된다.
단지, 여기서 시즈카 씨가 쇼키의 미래를 단순한 추락으로 묘사하지 않고 보기도 한다. 마지막 두 사람의 아름다운 작별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를 받아들이는 기카자와 그룹에도 공동체로서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카다 준이치가 연기하는 기카자와는 전쟁 후의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고 아이들에게 일과 식사를 제공하며, 남자답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아이들에게 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쿠자는 본질적으로는 불법 세계의 주민이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척하면서도 그들을 자신의 사업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MP의 존재를 인지하고도 위험한 일을 지시하고, 필요하다면 버림까지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의 불공정을 비판하는 그 스스로가 약소한 입장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쪽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를 어딘가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만다. 니시가와 씨는 이러한 매치모의 세계에 대해 특유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멋지운 세상”의 산마에 역시 폭력적인 행동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니시가와 씨는 그의 자부심과 의리, 인간애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기카자와에게도 비슷한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다만, 산마에가 스스로의 폭력성으로 인해 삶을 파괴해가는 인물이었던 것에 반해, 기카자와는 아이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 차이를 고려하면, 이번의 묘사에는 다소 달콤함이 남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조선인 소년 고야마의 귀속에도 의구심을 느꼈다. 어린 시절, 탄광 노동자의 자녀로서 일본으로 이주하여 고향의 기억 없이 일본에서 살아온 그는 일본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출생으로 인해 조선인으로 여겨져, 결국에는 민족적인 공동체로 귀속되어갔다.
물론, 이는 식민지배와 차별이 초래한 잔혹한 현실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에서 살고 싶고 바라는 사람도, 일본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같은 민족 공동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인의 기억이나 의지보다 민족적 출신이 소속을 결정해 버리는 방식에는 어떤 종류의 순화주의적 사상이 섞여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전쟁 후에도 일본에 남아 살았던 조선인들이 많았으니, 오야마에게도 다른 미래가 있었을 터이다. 그 판단이 반드시 자의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화 문제의 어려움을 느낀다.
이렇게 보니 영화는 킨코, 쇼키, 코야마에게 각각 다른 소속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킨코는 가정에서 물려받은 인간 관계에 의해 보호받고, 쇼키는 마치즈모 공동체에 들어가고, 코야마는 민족 공동체로 향한다. 전쟁으로 인해 한시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였던 아이들이, 전쟁 전부터 짊어졌던 특성 때문에 다시 다른 삶으로 분리되어 간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잔인하지만, 영화가 그 문제를 얼마나 의식적으로 파고들었는지는 조금 의문이 남았다.
西川 씨는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 사람을 쉽게 비판하지 않는다. 어떤 인물에게나 각자의 사정과 매력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이는 이토 준야 감독의 작품 세계와도 통하는 훌륭한 점이지만, 사회의 불공정을 그릴 때 누가 누구를 해치고 누가 이득을 얻는가라는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위험도 존재한다. 이번 영화에는 그러한 약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한 결과, 또 다른 주제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에게는 아이들을 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토치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시설에는 야가마가 있었다. 소년으로 살아온 기토치는 자신이 소녀임을 밝히려 결심하고, 모두 앞에서 옷을 벗으려 했다. 그러자 야스마가 그것을 막아 그녀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흐느껴 울었다.
너무 뻔한 장면이었다. 내 나쁜 습관 탓인데, 평소에 영화 주인공이 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감정이 식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을 울리는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유도하려는 연출에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타코가 울기 시작하는 순간 ‘그럴 수밖에 없네’라고 솔직하게 납득하고 버렸다.
그녀는 그동안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긴장해 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낀 그녀는 마침내 안전한 곳에 도착했을 때도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가마는 그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을 인정하고 더 이상 참을 필요는 없다고 말해준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차별과 위험에 노출되는 현실은 전후 80년이 넘게 흘러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의미에서 기타코의 구제는 현대 사회의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타카마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났을 뿐만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기타코가 앞으로도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가 당장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 따뜻한 포옹에는 그러한 희망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기토가가 그곳에 다다를 수까지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더욱 중요한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琴子を救ったのは鷹間一人ではない。戦時中に子どもたちを軍国主義教育へ導いた文美子も、当座を凌げるだけの貯えを得ると、戦後の混乱をひとつひとつ紐解くように彼女を探し続けた。
어둠의 시장에서는 히로에가 곤란한 킨코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고, 기쿠자와는 아이들을 둘러싸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격리 시설에서는 기자 모치지가 아이들의 상황을 알게 된 후 탈출을 돕는다. 젠페이는 배를 내밀어 그들을 구조했고, 그의 아내 케이와 함께 아이들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살아갈 방법을 가르친다. 킨코의 아버지 상은 죽기 직전에 딸의 미래를 친구 하라에게 맡기고, 하라는 그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들은 기토시의 삶을 혼자서 구원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착한 사람도 아니었고, 모든 행동이 옳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기토시의 목숨을 다음 사람에게 연결해 나갔다. 그중 한 명이라도 부족했다면, 기토시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드디어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성인들은 전쟁을 일으켜 아이들로부터 가족과 삶을 빼앗았다. 국가에서는 아이들에게 전쟁에 대한 충성을 가르치고, 패전 후에는 그들의 삶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다. 사회는 부패했고, 성인들은 거짓말을 하고 약자를 이용했다. 그 결과는 항상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이들을 괴롭게 만드는 사회를 만든 어른이라면, 그 아이들을 구하는 책임 또한 어른에게 있다.
여기 중요한 것은 그 책임(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미자는 아이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사상을 가르친 과거가 있으며, 菊澤는 아이들을 착취하는 측에도 서 있었다. 甚平와 け이는 또한 처음부터 자비로운 보호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아직까지 부정에 손을 뻗고 있는 사람에게도 눈앞의 아이들에게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 자신 스스로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누군가를 돕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개개인의 성의로운 의지만으로는 아이들의 삶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키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쇼하기나 오야마에는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키즈가 구원받은 배경에는 전후 시대의 가정 환경과 아버지에게 남겨진 인간 관계가 있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가정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떤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그것은 앞선 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 영화가 그려낸 전후 사회의 잔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책임을 개인의 선의에만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가정에 태어나, 어떤 성별이나 출신을 가지는지는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조건에 놓여 있든, 안전하게 살아가고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책임은 한 명의 보호자나 교사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어른들에게 있다. 눈앞의 아이를 돕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모두 놓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책임은 현재 살아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에도 미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드디어 이 영화의 반전이라는 주제가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전쟁은 어른들의 판단에 의해 시작되고, 그 결과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아이들이 감내해야만 한다. 키코와 같은 아이들에게 가족과 삶을 빼앗은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 아니다. 국가가 전쟁을 시작했고, 사회가 그것을 지지하며 막을 수 없었다. 그 책임을 져야 할 존재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히로시마에서 자란 니시카와 씨가 오랫동안 망설여 왔던 전쟁이라는 소재에 다가가는 것은, 이러한 미래에 대한 책임이라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전쟁의 비참함을 반복적으로 배우고 기억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는 그녀가,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가르치고 잊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기억을 맡기는 것은, 현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가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시즈카 씨가 오히려 반전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꺼낸 데에는, 그러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인간의 약점이나 이기심을 묘사하면서 등장인물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맡겨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삶을 빼앗는 전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어른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항상 아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명확한 의지를 영화로 표현하는 데 시즈카 씨는 제작자로서의 책임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니시카와 미와라는 작가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에서 20년――타인의 삶을 대신 끌어들이는 것
세키와 씨는 “뱀베리”나 “흔들리는”과 같은 작품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자기기만함을 드러내는 데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ゆれる”에서 묘사된 형제 관계는 그 극단적인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질투, 죄책감과 자기 정당화가 복잡하게 얽혀, 결국 누구 한 명을 완전한 피해자나 가해자로 만들 수 없었다. 타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버리면서도 그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인간의 약점을 잔인하게 그려냈다. 그 날카로운 시각은 지금도 니시카와 미와라는 작가의 최고의 재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즈카 자신은 “유레루”가 높이 평가된 것에 대해 어딘가 복잡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 다음 작품 “디어·닥터”의 시점에서는 이미 그런 무겁고 엄격한 영화만을 기대받는 것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의 성공 경험에 대해 오히려 거리를 두려하지 않는다. 그 약간의 엇갈린 자아 인식에도 나는 작가로서의 신뢰를 느낀다.
혹시 서지바시가 직접 만든 작품 ‘뱀 딸기’나 ‘흔들리는’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극단적으로 드러내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이 타인의 삶을 훼손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까지 그려낸 후에,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물론, 이는 작품 변화를 통해 추론한 것이며, 감독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어 닥터’ 이후 작품들을 되돌아보면, 그 안에는 하나의 흐름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내 진료인”의 이노는 의사라고 위장하여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남자다. 그의 거짓말은 용납될 수 없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거짓말에 의해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환자들과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이노는 자신이 감당할 의무가 없었던 책임까지 지게 된다. 정체를 폭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으며, 이전 작품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깊은 시선이 담겨 있다.
꿈을 파는 두 사람에서는 간야와 리지가 타인의 인생을 이용하여 결혼 사기극으로 자신들의 삶을 재건하려 한다. 그들은 사람을 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하지만 결국 간야는 그를 보호하려다 죄를 짓고 싶은 소년을 외면하지 않고, 그 죄를 스스로 뒤로한다.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그 행위로 인해 과거의 악행이 해결되거나 정리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생을 이용해 온 남자가 결국 타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다. 이 결말에는 이번 영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소가 이미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변명”을 하면 그 문제는 더욱 명확해진다. 아내의 죽음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幸夫가 타인의 아이들의 보살핌을 통해 조금씩 자신 이외의 인간의 삶에 관여해 나가게 된다. 幸夫는 갑자기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는 있다. 인간은 착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결점을 가진 채로도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가능하다.
“스바라시키 세계”에서는 그 문제가 더욱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산마에이는 마치즈모 세계에서 살아왔던 남자로, 자신의 폭력성 때문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사회 복귀를 목표로 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에 적응하기 어려워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니시카와는 산마에이의 결점을 충분히 이해한うえ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회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려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묘사했다.
이렇게 배열해보면, 이시카와 씨의 작품에는 타인의 삶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책임이라는 문제가 일관되게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꿈을 파는 두 사람”처럼, 오히려 인간의 이기심을 다시 한번 날카롭게 찌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어지럽히는 인간을 묘사하면서도, 그 인물이 타인의 삶을 대신 감당할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태도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강해진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질문이 성인과 어린이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 속에서 제기되었다.
성인 간의 관계에서는 서로의 이기심이나 책임을 쉽게 분별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른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때, 그 책임의 소재는 훨씬 명확해진다. 아이들이 스스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사회의 제도나 질서를 만든 것도 아니다. 어른들의 결정으로 인생을 빼앗긴 아이들을 어른들이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떠오르는 건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청춘’이다.
대인은 깨닫지 못해, 자신을 이해받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잃은 미숙한 소년의 분노에 기대어 공격성을 묘사한 트루포는 “思春期”에서는 아이들의 일상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면서 어른이 아이에게 지는 책임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학대받고 있던 소년 줄리아의 문제가 드러나고, 마지막으로 교사가 아이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는 트루포 자신의 결의가 표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번에 시즈카 씨에게도 이와 비슷한 각오를 느꼈다고 합니다.
흔들리는”이라는 작품으로 인간의 추함을 그린 작가이긴 해도, 그 재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후에도, 그렇기에 인간이 타인에게 책임을 지는 가능성을 그려내려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작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단순히 작風이 부드러워진 결과로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즈카 씨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장년 동안 그녀의 영화를 봐온 사람으로서 묘하게 기뻤다.
이 영화를 누가 제작했나요?
다만, 이 영화에 대해 논의한다면 작품이 어떤 조건에서 제작되었는지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西川 씨는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상은 점차 확장되어 6~7화 정도의 릴리즈 시리즈로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전쟁 고아들의 삶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문미자의 과거, 전후 여성들의 삶, 암시장 세계, 재일조선인 문제까지 파고들 경우,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대하 소설이나 장편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릴리즈 업계의 투자 환경이 바뀌면서, 그 기획을 현실화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다 시게사와 씨가 기획을 가져와서 신흥 영화 제작사 K2 Pictures였다.
西川 씨 스스로는 이번처럼 일본 영화사가 쉽게 제작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주연은 인지도가 낮은 조연이었고, 소재는 전후 직후의 전쟁 고아였으며, 더군다나 대규모 시대 재현을 필요로 했다. 흥행적인 성공을 예측하기 쉬운 기획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제작 예산이 없다면 패전 직후의 도쿄를 설득력 있는 영상으로 재현할 수 없었다. 저예산으로 작게 뭉쳐서 만들 정도라면,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판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영화가 관객을 150분 동안 몰입시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의 힘만은 아니다. 타버린 도시,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는 어두운 시장, 외딴 섬의 수용 시설,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 이러한 세계가 영상으로 구체화된 덕분에 관객은 아이들과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 전쟁의 비극을 전달하기 위해 퀄리티가 낮은 영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현재 관객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영화를 제작하는 이상 충분한 예산을 필요로 한 것은 영화를 낭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K2 Pictures는 기존 일본 영화 산업과는 다른 자금 조달 모델을 표방하며 설립된 회사이다. 영화 제작 펀드 “K2P Film Fund I”는 약 50억 엔화의 자금을 조달했다. 특정 영화 한 작품에 대해서만 투자자를 모으는 대신, 여러 작품에 분산 투자하여 전체 수익으로 위험을 관리한다. 한 작품의 성공 여부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에는 투자를 망설였을 기획에도 자금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다.
창업 캐피탈의 투자 모델과도 부합하는 아이디어이다. 물론 영화는 일반적인 스타트업 기업과는 차이가 있으며, 투자 자금의 모든 것이 순수한 민간 자본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다. K2 펀드에는 금융기관이나 일본정책투자은행 등도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품의 수익 예측만으로 기획의 가능성을 판단하지 않고, 여러 작품을 조합한 투자 방식으로 제작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이 없었다면 이번처럼 영화가 성공하기 어려웠을 이유가 무엇인지이다.
일본 영화에는 장기적인 제작 위원회 방식이 존재해 왔다. 자금을 분담하고 위험을 완화하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메커니즘이지만, 동시에 관계자들이 수익을 예측하기 쉬운 기획을 선택하기 쉬워지는 문제도 있다. 인기 만화나 소설의 영화화, TV 드라마의 극장판, 인지도가 높은 배우를 중심으로 한 기획 등은 그 판단에 적합하다. 그러나 사회적인 의미는 크더라도 시장에서의 성공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원작 영화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때때로 거액의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반전 영화는 특히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된다. 반전이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회피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주제만으로는 관객을 끌어들일 수 없으며, 또한 전쟁 후의 풍경이나 전쟁 장면 등을 재현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시장의 논리만으로 판단한다면, 더 쉽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획이 선택될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최근 제작된 다른 반전 영화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塚本晋也의 “넬슨 씨, 당신은 사람을 죽였습니까?”는 목하 그룹이 제작 위험을 인수하고 자회사인 키노 필름즈가 배급한 작품이다. 개봉 전에는 “다름한 사정”으로 인해 일부 극장에서의 상영 중단과 개봉 규모 축소가 발표되었다. 제작과 배급을 동일 기업 그룹이 담당하는 이상, 공급을 제한하여 수요를 집중시키고 수익의 확실한 회수를 목표로 하는 흥행 전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판단에는 상업적인 합리성이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관람 기회가 제한된 것도 사실이다.
石井裕也의 “개전 전야”는 원래 NHK 스페셜「시뮬레이션~昭和16년 여름의 패전~」의 드라마 부분으로서 제작되었으며, 도쿄 테아터 등의 참여로 극영화로 발전했다. 공영 방송의 보도 및 다큐멘터리라는 제작 기반이 없었다면, 일반적인 상업 영화의 기획으로서 성립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극장 개봉에 際하여 작품 속 인물의 조성을 둘러싸고 실제 인물의 유족으로부터 명예훼손 등을 주장하며 공개 정지까지 요구받았다. 제작 위원회는 창작상의 인물이라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항의 활동으로 인해 프리미어 상영회는 취소되었다. 역사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데 수반되는, 제작과는 또 다른 위험이 현실화되고 있다.
작년 공개된 마츠모토 준페이의 “나가시키—번쩍이는 그림자 속에서—”에는 나가시마를 거점으로 하는 자파넷 그룹이 영화 사업에 처음으로 투자하는 형태로 참여했다. 원폭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는 작품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현지 기업이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반적인 영화 사업과는 다른 동기에 의해 자금이 모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 작품의 경우 각각의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키시다 그룹의 자금, NHK라는 공영 방송의 제작 기반, 지역 기업의 문화적인 목적을 가진 투자, 그리고 모두 일반적인 상업 영화와는 다른 경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K2 Pictures의 펀드형 투자까지 더한다면, 전쟁의 가해 책임이나 국가의 잘못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가 기존의 자금 조달이나 기획 개발 방식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려운 일본 영화 산업의 현황이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을 반전 영화에 대한 모든 정치적 회피로만 설명할 수 없지만, ‘협의소작제’ 방식으로는 심각하고 정치적인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데 주저함이 있을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당연히 제작비 회수와 관객 동원 전망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예외적인 투자 판단과 제작 경로를 필요로 하는 현재 상황은 결코 건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영화가 완성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넬슨 씨” 개봉 규모 축소나 “전장전야” 개봉 금지 청구가 보여주듯이, 제작과 공개 각각에 따라 다른 장벽이 존재하며, 영화를 만들고 관객에게 전달되기까지 전체를 지탱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의미에서 K2 Pictures가 이번에 감수한 위험에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K2는 자선 사업으로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펀드로서의 성격상 투자자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으며, 작품에서 수익을 회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작에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는 동시에 상업적인 조건을 설정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러한 점이 완성된 영화의 형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에 바로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150분의 시간 제한과 사라진 피아노 솔로.
시작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극장에서 구매한 포стер는 1,500엔이라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100페이지를 초과하는 훌륭한 자료였다.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촬영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장대한 프로덕션 노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극장 포стер의 수준을 넘어선 자료 가치가 있었으며, 영화를 보는 것을 마치고 그 기록을 읽어본 결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졌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최종 편집을 둘러싼 일이었어.
고치코를 연기한 오야스에 아오미는 촬영을 시작할 무렵에는 피아노를 거의 연주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연습을 거듭하여 실제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고치코의 형을 연기한 사키라이 카네오의 바이올린 또한 실연이었다는 것이다. 음악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인 만큼, 배우들이 스스로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요소였다.
시설에 킨코를 데려오려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마지막 장면도 원래는 킨코의 피아노 솔로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고야부가 실제로 연주하는 모습을 한 번에 촬영한 결과, 그 장면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영화를 여기서 끝낼 수도 고려되었다.
김치의 이야기로는 매우 아름다운 결말이었을 것이다. 음악가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집을 잃고, 여성임을 숨긴 채 살아남아 온 소녀가 마침내 다시 피아노를 연주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것을 말에 의존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연주는 오랫동안 기술을 익혀온 고八重 자신의 노력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장기와의 이별 장면도 촬영되었다. 킨지의 피아노 솔로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장면은 편집에서 잘릴 예정이었지만, 촬영 종료 후 5개월쯤 지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아타레이코를 다시 불러들인 결과,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촬영 후 5개월 동안의 인간으로서의 성장이 연기의 표현에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하야마는 촬영 시보다 훨씬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이미 캐릭터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쇼키치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놀라울 정도로 깊어졌다는 것이다. 서지카는 그 장면을 삭제할 수 없었고, 키코는 서로에게 기대고 도움을 주며 함께 해 온 동료들이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을 이해하는 밝고 희망찬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던 아이들의 성장을 그리는 영화 제작 현장에서, 실제로 한 소년이 감독의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 성장이 새로 촬영된 영상이 아닌, 이미 촬영된 장면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되었다. 니시가와 씨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일단 결정한 영화의 결말을 변경했다. 하야마가 오프닝에서 보여준 성장을 그대로 남겨두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에는 150분이라는 상영 시간의 계약상의 제약이 있었다. 피아노 솔로와 쇼키(Shoki)의 이별을 모두 남기면 그 조건을 초과하게 된다. 그래서 니시카와 씨(Nishikawa-san)는 고심하여 촬영한 키토(Kito)의 피아노 솔로를 삭제하고, 쇼키와의 이별만 남기는 것을 선택했다.
이 일에 대해 알게 된 후, 이시카와 씨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삶이 바뀌어버린 아이들의 삶의 방식과 성장을 담아내려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아이들 스스로가 감독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성장을 보였다. 그리고 감독은 그 변화를 자신의 영화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처음으로 결정했던 구성보다, 눈앞의 배우가 실제로 보여준 것을 우선시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결과로 남은 것은 장기와의 이별이었던 데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琴子の피아노 솔로로 끝나는 영화는 그녀의 재생을 통해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하지만 장기와의 이별을 남겨두면서, 琴子が 되찾은 세계에 장기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이 끝까지 남는다. 두 사람은 같은 전쟁을 살아남았고, 같은 어두운 시장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는 琴자의 구원에만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아이의 미래를 관객에게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 판단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킨지의 피아노 솔로는 이야기 자체를 더욱 아름답게 마무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나는 쇼키와의 이별을 남겨둔 채 킨지의 피아노 솔로도 보고 싶었다. 양쪽 모두를 남겨두는 것이 영화의 주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제작 노트에 따르면, 수용 시설을 탈출할 때, 잠자는 경사가 깨어날 것 같은 순간에 고지가 자장가를 부르는 장면은 삭제해도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키와상은 오하시의 노래 목소리의 훌륭함과 영화에 이러한 개그 장면을 남기고 싶다는 이유에서, 오히려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일부 반론도 있었다. 극 중의 유머를 유지하는 데 의미가 있었고, 어른이 아이를 재우는 역할을 아이가 수영 선생님을 졸리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설정 역시 흥미롭다. 하지만 尺의 제약 때문에 피아노 솔로를 과감하게 줄여야 할 정도로 압박을 받았다면, 이 부분을 줄이는 선택도 가능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실제 장면의 길이와 편집상의 연결을 고려하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독의 판단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러한 반론이 제기되는 것과 니시카와 씨의 장인으로서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영화의 구성상의 완성도와 감독이 눈앞의 배우나 촬영 현장에 보여준 진심은 반드시 같은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 촬영한 피아노 솔로를 포기하는 것은, 니시카와 씨에게도 고통스러운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야마의 성장으로 인해 탄생한 작별 장면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완성작의 구성을 바꾸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찍고자 하는 영화의 본질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150분이라는 계약상의 제약이 문제됩니다.
이번 영화는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10분이나 15분만 더 길게 상영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상영 시간을 연장하면 반드시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촬영이 완료된 훌륭한 장면들을 남길 수 없게 된 것은 작품의 외부적인 계약 조건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상영 시간은 극장의 흥행 효율에 영향을 미친다. 150분 초과 영화는 일일 상영 회수를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제작 회사가 투자 자금 회수를 고려할 때, 상영 시간에 조건을 두는 것은 경제적인 합리성이 있다. 하지만 영화의 가치는 상영 시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몇 분의 차이가 모든 극장에서 같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영화가 아직 조금 더 길어질 수 있었다는 점이 허락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상업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제약을 이유로 K2 Pictures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전체적인 모습을 놓칠 수 있다. K2가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완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0분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손실된 부분은 있지만, 그 조건을 포함한 제작 과정이 있었기에야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예술적 자유와 제작 자금의 현실 사이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긴장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제약 조건을 미화로 치부하거나, 상업적인 조건을 모두 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보다 자유로운 영화 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어떤 자금 조달 방식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것이다. K2의 도전이 성공하고, 그 다음에는 160분, 170분 등 작품이 필요로 하는 긴 러닝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생기면, 그것은 일본 영화에 있어서 하나의 진전이 될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만들어낸 것들
이번 영화를 지지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출연 배우들의 헌신적인 열정이었다.
이케다오 퓨미, 야마다 히로시, 타나카 유키, 오카다 준이치, 요시다 양이, 타케노나티요, 키타무라 유키야, 사카도 류타. 일본 영화계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실력파 배우들이 모여 있다. “만引き家族”의 경우, 이세다이가 각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들을 모았다는 취지를 약간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이번 니시가와 작품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모두가 평범하게 훌륭하다. 누군가 자신의 연기력을 과시하는 듯한 모습 없이, 각자 후전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료호 히로시와 다나카 유코의 부부 관계는 짧은 등장 시간에도 불구하고 오랜 삶이 느껴지고, 오카다 마사요시는 菊澤(교자)라는 인물의 매력과 위험성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요시다 유는 마지막으로 기토와 함께하는 포옹에 영화 전체의 감정적인 결론을 맡겨, 그것을 완벽하게 수용한다.
이각층 건물 문미즈모 훌륭하다.
“翔んで埼玉”처럼 황당무계한 희극에서 스스로와 성별이 다른 캐릭터를 낭만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재능 있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쟁 중에는 군국주의 교육을 담당하고, 패전 후에는 자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여성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연기할 수 있을지 놀랐다. 문미코를 훌륭한 교사나 착한 보호자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약점이나 이기심까지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데, 시게노의 인물 묘사(人物造形)와 이가오토의 연기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또한, 그 명연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영화의 중심을 담당하는 것이 고오하시 아오미와 하야마 유이치로 등 아역 배우들인 것도 중요하다. 그들은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에 묻히지 않도록, 때로는 성인들을 압도하는 듯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니시가와가 배우의 연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앞서 언급한 프로덕션 노트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많은 주연급 배우들을 모으는 것은 당연히 제작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개별 출연료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에서 얼마나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대 재현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배우들을 기용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자에게 지출된 비용에 따라 얻은 것은 매우 크다. 150분의 영화에 이렇게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경우, 한 사람 한 사람의 과거와 사정을 충분히 설명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뛰어난 배우라면, 적은 장면에서도 인물이 살아온 시간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 이번 캐스팅은 단순한 화려함 추구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제한된 상영 시간을 지탱하기 위한 연출상의 선택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전달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서강선님은 전쟁의 비참함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의 관객이 극장에서 보기를 바랄 만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상의 풍요로움과 배우의 실력도 필요했다. 제작비를 삭감하여 줄였다면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영화가 넓은 관객에게 닿았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번 배우진의 충실함은 무의미한 낭비가 아니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제작사가 선택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도 전달해야 한다.
이 영화가 흥행적으로 성공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내가 관람한 시네마리스에서는 100석 규모의 극장에 60% 정도의 관객이 들어왔지만, 이 규모의 제작비를 회수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해외에서의 평가나 흥행에도 기대하고 싶지만, 전후 일본의 역사를 다룬 150분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가 완성되어 극장에서 공개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니시가와 씨가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전쟁이라는 소재에 맞서 K2 Pictures가 투자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배우와 스태프가 참여하여 마침내 실현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제작 과정에서는 다양한 제약이 있었고, 완성된 작품에도 결점은 남아 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외에도 때로는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서준 씨는 이번에 기존보다 감성적인 연출을 선택하여 아이들의 모험과 유머를 중요하게 생각한 점에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을 묘사하는 데 그치면 훨씬 더 엄숙하고 구원의 여지가 없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준 씨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이다. 그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80년 전 일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하기 위해서는 영화 자체의 매력도 필요했다. 그래서こそ 이렇게 거대한 제작 규모와 뛰어난 배우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모든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전쟁은 아이들이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으며,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책임 또한 지금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아이들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가르치고 기억을 계승하도록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그 책임을 이행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들이 살아갈 미래를 전쟁으로 다시 파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우리 스스로 가져야 한다.
히로시마에서 자란 반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니시가와 씨가 오랜 심사고찰 끝에 이 영화를 제작한 의미를 저는 그곳에서 찾고 싶다. 인간의 약점과 이기심을 날카롭게 그려낸 작가가 이번에 전쟁을 부정하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자 했다. 그 결정이 영화로서 결실을 맺은 것을 진심으로 기쁘다.
또한, 이 영화를 받은 우리 역시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즈미 카와미라는 영화 감독을, 이전보다 훨씬 더 믿게 되었다. 그녀가 다음으로 무엇을 찍을지, 앞으로도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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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Gemma 3(.44) 초벌 + 교정 90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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