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쿠지라에 떨어진 남자』: 스테인벡적 자연관을 배제하고 인간중심주의로 회수하는 불가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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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10-25T18:44:19.767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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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고래라는 생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영 중인 영화『고래에 떨어진 남자』를 보러 갔습니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단 하나, '인간이 고래에 삼켜지는 영화'라는 점뿐입니다. 시각 효과나 예고편, 그리고 한국어 제목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생물학적 고래인 마코우고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인간을 삼키거나, 그 인간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것이 판타지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즉, 『백경』처럼 고래를 어떤 상징으로 활용하거나, 『라이프 오브 파이』처럼 불가능한 사건을 통해 인간상을 그려내는 장르의 작품일 거라고. 즉, 문학적 감성이 섞인 드라마 영화일 거라고 예상한 거군요.

그리고 저의 예상은 절반이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확실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이며, 그 의미에서 고래나 자연은 상징을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합니다. 해의 남자인 아버지가 좋아하는 문학으로 언급된 작가로서 스타인벡의 자연관이 다루어지지만, 이 작품은 스타인벡풍의 자연관을 거스르며 현실과 상징을 섞어 넣고,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를 위해 자연을 소비해 버린 듯합니다.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말하면서도 인간중심주의로 회수해버린다는, 이 얼마나 어려운 자만심인가.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기형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녕하세요, 망랑의 사고자 마타타비·나스카입니다.

이번에는 영화『쿠지라에 떨어진 남자』에 대해 성찰해 봅니다. 해양 생물 애호가이자, 특히 친하지 않은 아버지를 둔 아들로서 이 작품과 마주해 보겠습니다.

또한,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이야기의 결말에 대해 언급합니다. 스토리 전개가 공개되기 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크게 네 가지 포인트로 설명합니다.

- 고래와 해양 포유류의 매혹
- 제목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닌지? 원제목에 담겨 있던 함의
-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을 다룬 드라마
- 『라이프 오브 파이』와의 비교에서 드러난 불가피성

그럼 오늘도 오늘처럼 사유를 돌아보겠습니다.

## 고래와 해양 포유류의 로맨스

고래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포유류의 일종입니다. 고래는 물속에서 태어나 물속에서 생애를 보내는 완전한 수생동물입니다. 그들 종은 근본적으로 소나 사슴과 같은 분류인 '고래목'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아주 오래전 육지를 걷던 다리가 있는 동물에서, 그렇게 정교해진 바다의 생물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에게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고래입니다. 폐로 호흡하면서도 깊은 바다까지 잠수한다는 낭만에 찬 존재입니다. 한 번만 보더라도 거대한 검은 덩어리처럼 보이며, 동물의仲間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입인지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코어쿠지라라 하더라도 그 목이나 식도가 인간을 삼킬 수 있을지라니 의문점이 큽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 낭만을 이루어준다고 해서 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낭만을 위해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삼켰습니다. 나중에 반복되겠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거짓말을 삼키는' 이 감각을 기억해 두세요.

그렇기에 거짓말을 삼키기만 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해저 절벽, 즉 흔히 드롭오프라 부르는 곳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함. 그리고 어둠의 깊은 다이오우이카와 탁한 바다의 커튼 너머로 몰아닥치는 마코르키지라. 이 일련의 장면들의 공포와 야생동물과 호흡하는 듯한 느낌은 영화관의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 시스템에서만 즐길 수 있습니다. 배우들도 모두 훌륭했습니다. 특히 조슈 브롤링 씨가 맡은 아버지役의 낮은 목소리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실력이며, 영화관의 사운드 시스템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 제목이 좋지 않은 건 아닌지? 원제목에 담겨 있던 함의

그런데 이 작품이 흥행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평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아마도 이 한국어 제목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작의 영어 제목은『WHALEFALL』입니다. 물론 '고래가 떨어진다'는 뜻이지만, 이 단어에는 이중의 의미가 겹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래뼈 생물 군집'입니다. 고래뼈 생물 군집이란 죽은 고래의 시체가 심해 바닥에 가라앉으면, 그 몸이 수백 년에 걸쳐 다양한 생물의 삶을 지탱하는 작은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큰 죽음은 무수한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묘지가 되는 것입니다.

원제는 이 이중적 의미를 통해 고래의 '사'가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는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작품 내에서도 대사를 통해 언급됩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재생. 이 영화가 은유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을 원제는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건 은유적이며 문학적 감을 띤 영화일 것"이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어 제목에서는 그 뉘앙스가 모두 제거되어 단순한 설명에 불과해졌습니다. 『고래에 떨어지는 노래남』이라는 제목만 보면 마치 '고래에 먹힐 듯이 느껴지는 몬스터 패닉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고, 문학적 깊이를 지닌 영화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생일 케이크를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든焼き菓子'로 소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생일'이라는 의미가 결여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본래 이 영화가 도달해야 할 대상에게도, 오히려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문제는 일본어 제목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은유적 영화로 시작되었으나, 그 은유를 다루는 방식에서 어디선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을 다룬 드라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라는 관객에게 이 영화에는 반드시 흔들리게 되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드라마였습니다.

이 작품 속 아버지는 바다의 남자입니다. 스타인벡의 소설을 사랑하며 아들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가 아는 것은 자연의 섭리, 생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생태계의 논리, 그리고 바다에 대한 애정뿐입니다. 아버지의 시야는 확립되어 있지만, 말하자면 매우 좁은 세계입니다.

주인공의 젊은 시절, 그런 아버지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 것에 실망했습니다.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스스로 생명을 끊은 후에도, 주인공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거대한 마코우쿠지라에飲み込まれて버린 것입니다.

고래의 배 안으로 갇힌 주인공은 점차 고래와 아버지를 동일시하게 됩니다. 도망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잠깐만이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산소가 고갈되거나 소화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호흡을 오래 유지시키고 탈출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살아남는 기술'입니다. 즉, 아버지의 가르침에 압도당하면서도 그로부터의 이별과 탈출을 갈망하면서도, 오히려 그 가르침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자립을 원하면서도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계속 마주하게 하는, 10 대 청년이 겪는 내면의 갈등입니다.

고래의 몸속이라는 탈출구가 없는 밀폐된 공간은 '보호받고 있는 동시에 갇혀 있는' 이 감각을 그대로 상황 속에 투영하고 있습니다. 무대와 주제가 잘 어우러진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일 것입니다.

저 또한 아버지와 관계에 고민을 겪었던 한 남자로, 이 주제가 나에게 부딪히면 무조건 흔들립니다. 십대 시절 제가 강제적으로 은둔에 빠졌을 때, 아버지는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게 참 미안한데, 내 아들인데", "학교에 돈을 내는 건 내가 하는 거야, 너는 의지와 전망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는 식의 말로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강하게押しつけられる 보호와 애착,そこから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는 폐쇄감. 집 안에 있되 불안에 시달리는 매일.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려진 방식은 다소 스테레오타입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흔들립니다. 왜 아버지와 아들은 이처럼 강력한 주제일까요.

저의 견해로는 이는 논리보다 앞서는 '雄'이라는 성별 규범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무리를 위해 동료들과 협력하며 위험을 감수하며 앞장서려는 측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면서도 결국 영토를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서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나 형제자매를 포함한 가족이라는 단위로 보아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운명 공동체이며 협력해야 합니다. 영토를 나누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리의 구성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반된 성향성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본질일까요.

## 왜『라이프 오브 파이』가 될 수 없었을까

그 영화는 보았지만, 특별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후는 이야기의 결말을 다룹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야기의 후반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고래의 태내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의지하며 살아남으려 합니다. 어느덧 고래는 사자의 습격에 맞아 약해집니다. 그때 주인공은 마음속에서 아버지와 대화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주인공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아버지의 편지를 마침내 개봉합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와 마주하는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형식적 틀을 넘어선 보편적인 힘과 강함을 지닌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어떤 배경 위에 세워져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고래의 태내에서 겪은 환상적인 여러 경험들, 그리고 그 거대한 마코우고래가 수십 년 동안 살아온 강력한 생명력이 단 몇 시간 만에 위협받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우연성까지 모두 현실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는 멈칫했습니다.

비교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영화는 『라이프 오브 파이』입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동물들과 함께 바다를 떠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환상적인 이야기는, 너무도 잔혹한 현실을 마음에서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었습니다. 구원된 후 주인공은 또 다른, 끔찍한 인간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과정에서 청취자에게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라고 묻습니다. 자신이 환상 쪽을 선택했다고 깨닫는 사이입니다.

즉, 그 영화는 관객에게도 '현실과 환상,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행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은유는 은유로서 성립합니다. 또한 현실의 희생을 경시한 것은 아닙니다. 관객은 이야기 너머에 실제로 잃어버린 생명들이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함께 겪었다고 여겨지는 트라 리처드 파커는 이별의 순간에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숲으로 떠났습니다. 동물은 인간의 편의에 맞춘 이야기로 포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영화는 그 사실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 현실 속에 혼재된 은유

이 작품은 그 반대를 선택했습니다. 중반까지는 산소병의 잔량, 잠수 기술, 아버지로부터 배운 실용적인 지혜와 같은 물리적 제약의 리얼리티로 긴장감을 구축한 영화입니다. 관객은 이 세계의 규칙을 믿도록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같은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주인공이 고래를 아버지와 겹치고, 아버지가 약해져 죽고, 그 배를 뚫어 탈출하는 은유적 사건이 특별히 어떤 경고 없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고래의 몸속에서 입은 상처도 그대로 남아, 사실적으로 구출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사람이 "아버지가 찾아와 주셨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사실 그대로 "무지개가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찾아와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위험한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정신이是否正常한지 의심을 받을 것입니다. 주관적 사실과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앞선 작품과 뒤선 작품의 경계를 지키고, 이 작품은 이미 뒤선 작품의 영역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는 현실 속에 은유를 혼동시키는 행위입니다. 자연 속의 사건들이 한 인간의 심리 드라마와 동기화되어 일어나며, 이것이 인식론적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묘사될 때 자연은 인간을 위한 무대 장치로 변해버립니다. 이것이 자연의 소비이자 인간 중심주의의 고집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이니까 그 정도는 너그럽게 봐야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분에 대해 명확히 반대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작품 속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가치관이 자연의 섭리와 생태계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즐겨 읽던 스테인벡은 항해기에서 생물을 '왜'라는 목적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사실 자체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 작가입니다.

즉, 자연은 인간의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래가 먹이를 습격하는 것은 배가 고파서이고, 마코우고래가 고기를 먹는 것은 그것이 먹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좁지만, 아들은 그 틀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아버지가 적어도 바다를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정직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연을 아들의 마음의 거울로 삼는 것은 작품에 담겨 있는 주제 자체를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이 의미에서 이 작품은 아버지가 스타인벡의 자연관을 어깨에負負고, 그 가르침으로 주인공을 살아남게 하되, 마지막에는 고래의 생과 죽음을 아들의 마음 위해 움직이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자연관을 편의에 따라 무시하고 결국 인간중심주의로 회수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영화로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면 관객들도 그つもり로 감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연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연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아버지의 좁은 세계를 사랑의 이야기로 확장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의 가족의 규모로만 축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 고래를 한 마리의 고래로 보는 용기

다시 한번 결론을 명확히 하겠습니다. 『고래에 떨어진 남자』는 고래와 거대 생물의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관람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형식적으로는 그렇지만 매우 강렬합니다.

하지만 스타인벡의 자연관을 거스르며 리얼리즘 속에 은유를 섞어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를 위해 대자연 자체를 소모해버린 점에 대해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인간중심주의로 회수할 수 없는 그 부조리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라이프 오브 파이』처럼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모두 지니지 못했고, 후대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되지 못했음을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고래의 태내에서 아버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고래를 인간과 무관한 '단 하나의 고래'로 바라볼 용기를 끝까지 갖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풍자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화면 밖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연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타인을까지 소비하는 존재입니다. 죽은 가족을 자신의 화해 이야기의 등장인물로 설정하고, 자녀에게 자신의 인생 재시도를 연기하게 하며, 떠난 연인을 성장의 시험으로 밀어 넣습니다. 모두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의 흐름에 맞춰 상대방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야기를 없애고서는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마음을 지탱하는 데도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와 그 사람 사이에는 조금씩 틈을 두어야 한다. '이건 저에게 있어서의 이야기다'는 실감과 '그 사람은 저의 이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거리를 모두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제시한 뒤, 그중 하나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만약 그런 관계 방식이 가능해지면 이야기가 우리를 태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누군가를 자신의 이야기 위해 소비해버린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부모님을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생각할 만한 점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완료했습니다.

**출처:** [note 원문](https://note.com/soul_jam/n/ne2b456c329f1)

*번역: Qwen 3.5(.48) 초벌 + 교정 36청크*

[원문 보기](https://note.com/soul_jam/n/ne2b456c329f1) | 출처: note.com